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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Dec 05. 2020

인정투쟁의 장에서 딴청 피우기

#22 허구한 날 인정해달라고 조르는 꼴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우리 아버지는 평생 모아둔 돈을 주식투자로 날렸다. 이는 우리 가족에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나는 고등학교 때 강박적으로 구워대던 3천 장의 시디를 하루아침에 내다 버렸다. 처음엔 좋아하는 작품만 간직하려던 게 집착으로 바뀌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그 시간이며 돈이 다 얼마야. 하지만 이런 깨달음은 때를 놓치고 나서야 날 습격한다. 한때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수긍한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예측처럼 무탈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불현듯 밥을 먹다 말고 흰쌀을 보며 말을 건다. '이 짓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소파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며 다 소용없는 노릇이라는 생각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다시 하던 걸 마저 한다. 습관으로 이루어진 삶. 관성처럼 튕겨 나가듯 채워지는 일과. 난 무엇을 위해 책상에 앉아 골몰하는 거지. 무의미의 축제는 멈춰 세우면 비관만 보인다.


 사실 내가 택했던 길 마디마디엔 빌어먹을 인정 투쟁이 도사리고 있었다. 뒤떨어지기 싫은 열등감이 무의미라는 약수통에 청정한 물을 받아내게 했다. 하지만 성과는 졸졸에 불과하고, 나는 콸콸 조급해져서는 시시콜콜한 뭐 하나 제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직업을 택할 때도, 여자 친구에게 차였을 때도, 인생이 남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에도 시선의 감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입방아에 오르는 일보다 나쁜 것은, 입방아에도 오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타인이 나를 향해 던지는 말 한마디가 날 추동한다.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날 쳐다보던 그의 눈빛을 떠올리며 힘을 낸다. '시발 그래 내가 죽이는 거 하나 보여준다.' 내가 올린 글이 세상에 미동조차 주지 못하면 실의에 빠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자아실현은 얼어 죽을, 난 그저 누군가의 평가를 의식하며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이다. 출근해서도 종일 격려를 추심하는 무뢰한처럼 동료 앞을 기웃거린다. 나를 향해 상사가 지껄인 말 한마디를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억한다. 연료가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하는 그런 말에 목을 맨다.


 흥미로운 인문서를 다수 집필한 영국 작가 '필 콜린스'의 <밴버드의 어리석음>은 전 세계, 여러 세기에 걸친 과학자, 화가, 작가, 사업가, 모험가 13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때는 꽤 잘 나갔던 이들이다. 화려하게 비상했다 여지없이 고꾸라졌다는 소리다. 대중이 좋아하는 건 신데렐라 스토리지만, 가장 재밌어하는 건 신데렐라가 다시 추락하는 이야기다. 그건 마치 지구가 가루가 되는 재난 영화를 보며 내 안전을 확인하는 기쁨과 같다. 난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위안이 그들의 실패를 즐기게 한다. 나는 고약한 위안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13인은 타인의 평가에 있어 낙제점을 받은 학사경고의 삶을 살았다. 저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거다. 대중의 환호를 받는 록스타가 되기 위해 허튼짓을 참 많이 했지만, 까딱 하나 잘못해서 가진 돈을 탕진했다.

 다 읽고 나니 빅토리아 시대나 요즘이나 크게 다들 건 없어 보였다. 이 시대의 인정 투쟁의 장은 저잣거리에서 SNS로 바뀌었을 뿐이다. 나도 인스타그램 속 어그로 전장에 참전했으나 패잔병이 되어 브런치로 돌아왔다. 어찌나 경쟁이 치열한지 온갖 자극적인 말이 쏟아진다. (브런치라고 다를쏘냐) 특히 나로서는 뱉기 어려운 자극적인 말과 음란한 사진이 패기와 멋으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솔직함을 가장한 위악이 기승을 부린다. 관심을 끄는 공식이 엄연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것도 부지런한 유저의 미덕이다. 부가 캐릭터라는 말이 뭔가. 기존의 나를 숨기고 SNS상에 손쉽게 또 다른 허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같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세상에 대해 말하길 주저하는 이들은 루저다. 네티즌이 열광하는 인플루언서는 예나 지금이나 삑사리도 좀 내고, 남들 속도 좀 뒤집어 놓고 온갖 논란을 만들면서도 쉽게 반성하는 시끄러운 종자다. 일단 관심을 끌면 성공이니 주저함 없이 허튼소리를 뱉는다. 그러다가 얻어걸리기라도 하면 큰돈을 만진다. 관심이 곧 돈인 세상에서 매사 인품 좋고 남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건네는 신사는 이제 인기가 없다. 품위를 지킨답시고 점잔을 떨어봐야 한 마디로 노잼이다. 위악이 위선을 가뿐히 앞선다. 두둑한 배짱으로 기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자만이 팔로워를 늘려간다. <밴버드의 어리석음>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시작된 19세기 인플루언서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현실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게 재밌다. 다 미쳤다고 손가락질해도 이목을 끌기 위해서 무리하다 엎어졌던 패자의 기록이다. 당신이 한 물 갔다고 팔로워를 끊은 그런 유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운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한몫 단단히 챙겨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을 텐데.


 누구나 성공담을 읽는 시대에 실패담을 찾는 이유는 고유하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처럼 행복은 다 비슷하고 불행은 다 제각각이게 마련이다. 성공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뻔한 방식으로 치켜세워지지만, 나자빠진 불행엔 영문 모를 페이소스가 깃든다. 추락하는 폐곡선에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기묘함이 있다. 리스크를 스스로 감수했기에 바닥에 떨어져도 비실비실 웃음이 비어진다. 내처 드러나는 광기와 치열한 자책은 인생에 있어 쉽게 볼 수 없는 구경거리다. 실패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이라 마치 이것이 인생이 아니겠냐며 따져 묻는 주취자의 비틀린 미소처럼 꺼림칙하다. 드라마는 결국 비극이 자아낸 비정함에 있다.

 <밴버드의 어리석음> 첫 장에 등장하는 ‘윌리엄 헨리 아일랜드’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필체를 위조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대문호의 미발견 원고를 발견했다고 떠벌였다. 매사 빈둥거리며 여자나 밝히고 노름 짓이나 일삼던 아들놈이 생애 처음으로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자 아버지는 감격한다. 재밌는 점은 고무된 아들이 셰익스피어에 빙의해서 진짜 소설을 창작하는 데 이른다는 점이다. 폴 콜린스는 작가의 위상을 갖추게 된 윌리엄을 조명하며 이른바 열등감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인물로 묘사한다. 피카소가 말했듯이 '저급한 자는 베끼고, 위대한 자는 훔친다.' 윌리엄이 비로소 훔칠 수 있었을 때 그의 거짓말은 온 천하에 탄로 난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지. 그는 세간의 조롱을 피해 평생을 도망 다닌다.


 비슷한 이야기는 현대에도 많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보면 '마크 저커버그'는 전 여자 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페이스북을 개발한다. 매정하게 자신을 차 버린 그녀를 향한 복수심이 몇 병의 맥주가 일으킨 취기와 섞여 걸작을 탄생시켰다. 어느 시점까지는 모험적인 탐험가로 보였던 개발자 마크는 전 여자 친구가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고 경멸하자 사업을 확장한다. 이 선택이 그저 몇몇 대학에서 론칭했던 페이스북을 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려던 게 인류 문화를 바꿔놨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마크가 나와 비슷했던 건 여자에게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다. 한때 부인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좋아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가 한 짓들을 인정한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 장기자랑에서 여자애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래 연습에 매진했고, 작가가 되려는 것도 구 여자 친구를 향한 그리움과 증오가 한몫했다. 심지어 돈을 벌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는 것까지 여성의 환심을 사려는 수컷의 몸부림이 있다. 여자가 전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부분집합의 상당을 차지한다.

 기껏 여자 친구를 사귀어보려고 거짓말을 일삼았다. 잘못한 건 잊고 원망만 하며 복수심에 터무니없는 소리로 그녀를 황당하게 했다. 나를 좀 사랑해달라는 애걸복걸이 죄라면 나만 죄인은 아니라는 믿음으로. 사실 지금도 반성보다는 더 나은 거짓말을 수련하고 있다. 온갖 누추한 생각을 하면서도 깨어있는 사고를 하는 지성인 흉내를 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크 저커버그와 내 차이는 계좌의 잔고뿐이라고 생각했다. ‘허구한 날 인정해줘.’


 영화 <소셜 네트워크> 마지막에 이르면 마크는 전 여자 친구의 페이스북에 친구 신청을 한다. 자기가 만든 페이스북에 그녀가 기입한 정보가 보인다. 프로필 속 사진은 환하게 웃고 있고, 정보란에 그녀는 여전히 싱글이다. 이제 그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면 다시 날 품어줄까. 그녀의 사진이 띄워진 페이스북 페이지를 바라보며 계속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는 마크. 영 앤 리치의 대명사가 된 그는 희한하게 절실하다. 영화는 제목처럼 사회적 관계에 대해 말하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관계가 없는 시대가 맞닥뜨린 열망을 다루고 있다. 이 거대 서비스가 한 남자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면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게 보잘것없는 바람이 세상을 2도 정도는 뜨겁게 한다는 말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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