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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08. 2021

책과 함께하며 받는 기운

#23 밤에는 독서만한 안식이 없다

 아침 7시 알람이 울린다. 어서 일어나야 한다. 몸을 일으키기만 하면 기계처럼 출근 준비를 마칠 것이다. 십 년을 넘게 해온 짓이 아닌가. 근데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알람을 끄고 십 분 후를 기약했다. 곤혹스러운 몸뚱이가 이불속으로 녹아든다. 초조한 마음으로 잠에 빠졌다. 몇 번이나 켜고 껐을까. 더는 지체할 수 없을 때가 돼서야 가까스로 눈을 떴다. 어렵사리 몸을 추스르고 어제 듣던 팟캐스트를 켰다. 언제부턴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난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벗 삼아 출근 시간을 지탱해왔다. 운전하면서도 러닝머신 위에서도 이동진 작가는 소설가 김중혁과 신나게 떠든다. 빨간책방은 7년의 대장정을 끝으로 종영했지만 난 전 회차를 정주행 한 것도 모자라 그냥 생활 전반에 배경음악처럼 깔아놓고 산다. 이 나긋나긋한 아저씨가 뭐가 좋은지 좀처럼 질리지 않는다. 뿐만이 아니다. 난 그가 추천한 책을 읽고, 그가 기고한 글을 빠짐없이 찾아 읽으며 자투리 시간을 용해한다. 그가 사회를 맡은 시네마톡 행사에 예매하고, 그가 추천리스트에 올린 영화를 챙겨본다. 그가 매긴 별점과 내 별점을 비교하고, 그가 쓴 평론을 읽으면서 내 감상과 비교해 보는 게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근면한 작가 이동진은 일상 곳곳에 자신의 지성으로 축대를 쌓아놓고 나를 불러들였다. 난 그 속에서 꽤 많은 특권을 누리며 사는 중이다.

 이동진 작가는 작년에 20년 동안 기고한 영화비평을 갈무리해 비평집을 출간했다. 요즘처럼 긴 글을 회피하고 문해력이 떨어지는 시대에 무려 944페이지에 208편의 영화를 다루는 책을 낸 것이다. 그는 이 벽돌 같은 책으로 영화를 향한 사랑을 측정 가능한 수치로 보여줬다. 그의 꾸준한 작업량은 때론 양이 질을 보전할 수 있고 오히려 두께가 그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나처럼 양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사람에겐 위안을 주는 바가 있다.

 이동진은 평론가라는 정체성 외에도 여러 결을 지녔다. 그는 14년간 기자로 활동했던 언론인으로 저널리즘에 입각한 글쓰기에도 능하다. 또한 3권의 기행 수필을 쓴 여행작가이기도 하다. 여기에 더해 이동진은 소문난 애서가로 독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출간했고, 최근엔 자신의 서가에 담긴 책과 물건을 탐구하여 쓴 <파이아키아>라는 두꺼운 책을 냈다. 이처럼 난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을 옆에서 구경하면서 모방한다. 그를 롤모델로 삼고 맹목적으로 흉내 내기에 이른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어쩌면 속아 넘어가면서도 그냥 믿어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세계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어떠한 의문도 제시하지 못할 때 사람은 위험해질 수도 있지만, 그가 균형 잡힌 지식인이라면 그보다 믿을만한 도피처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탐험가 기질을 믿고 어느 분야든 따라가서 어쭙잖게 찧고 까분다. 문학은 물론 경제학, 도시공학, 뇌과학 그 싫어하던 세계사까지 그의 저서에는 다방면의 지식이 산재해있다. 이동진을 보면 호기심이 많다는 건 삶이 지루할 수 없는 이유로까지 느껴진다. 어디든 가리지 않고 들어가서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는 일직선의 방향에 골몰하던 내게 방사형으로 넓어지는 삶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줬다.

 이동진이라는 사람의 핵심은 독서라는 지층을 기반으로 한다. 독서는 시간 제약을 넘어 제3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준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굳이 가지 않더라도 지중해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남수단 내전을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그들의 비극과 공명한다. 독서는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고, 어느 순간 실제보다 현현한 감각을 얻어오는 능동적인 경험이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독서의 신비로운 기쁨을 나누고픈 욕심을 피력한 바 있다. 나는 처음 책을 만졌을 때, 냄새를 맡아보고 지근거리에 두며 애정을 쏟던 애송이 시절을 기억한다. 그렇게 읽는 책들이 모여 취향이 생겼고 이를 발판 삼아 내 이야기가 한 권의 책으로 엮이길 기대하며 산다. 조르바와 개츠비가 날 찾아왔고 그들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발품 팔아 크레타 섬에 들르지 않아도, 복잡한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를 걷지 않아도 독서는 날 어디로든 떠밀었다. 난 책을 가방에 넣고 사무실의 김 대리 신세에서 벗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문학 소년이 된다. 침대 위 30촉 백열등에 의지해 더듬더듬 문장을 읽어 내려간다. 이렇게 이동진은 어느새 내 일상에 스며들어 의식하지 못한 새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여전히 쉼 없이 뭔가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세계를 경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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