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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09. 2020

꿈이 사라진 시대의 낭만

#25 영화 인사이드 르윈에서 르윈은 왜 꿈에 집착할까

 내가 하루가 멀다고 영화를 보니, 사무실 선배가 한 소리 보태더라. 젊은 놈이 컴컴한 영화관에 처박혀서 먼지나 마시면서 주말 밤을 다 날리냐는 그런 우스갯소리. 뭐 그런 것까지 참견하나 싶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엔 보폭을 좀 넓히려고 한다. 미술관, 목공소, 공연, 근교 여행 같은 것들. 오랜만에 동기를 만나 고기도 굽고, 달밤에 조깅하며 코에 찬바람도 좀 넣는다.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축구도 뛰고, 책장에 묵혀둔 흑사병에 관한 책과 씨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겨울엔 영화가 그립다. 카페에서 막 로스팅된 원두커피를 마시며 칙칙거리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보는 것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극장에서 영화 포스터를 구경하고, 상영 전에 틀어주는 예고편만 봐도 설렌다. 영화를 보고 나와 몰스킨에 감상을 적는 것도 기껍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영화보다 더 즐거운 놀이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난 극장이라는 공간이 좋다. 컴컴한 스크린을 노려보는 행위만으로 일상을 차단하고, 누군가가 만든 세계로 접어드는 희열을 사랑한다. 인위적으로 의식을 차단해서 다른 세상을 보는 경험은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가 된 기분을 준다. 파란 약을 집어삼키고 심연을 떠다니는 기분이랄까. 2시간의 딴청으로 내 속을 시끄럽게 하는 잔소리를 잠재운다.


 나는 유독 겨울에 극장을 자주 간다. 길을 걷다가도 그저 포스터의 느낌이 좋아서, 우연히 마주친 배우에 끌려서 무작정 들어간다. 주말에 빈둥대다가 시간이 비면 영화를 예매하고, 극장 앞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받아 들고 종종걸음으로 표를 찾는다. 세탁소에서 두꺼운 옷을 찾을 때처럼,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녹아드는 얼음을 발로 툭 칠 때 바스러지는 감각처럼 겨울에 보는 영화는 늘 다감하다.

 <인사이드 르윈>도 겨울에 봤다. 뉴욕의 시린 겨울과 통기타 소리가 쩡쩡해지면 르윈은 어디선가 지껄이는 조롱 섞인 휘파람을 모른 척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코트 하나 없이 기타 하나 달랑 매고 매일 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민폐를 끼치는 르윈은 처량한 신세다. 무일푼 뮤지션에 얼마 전까지 같이 듀엣곡을 부르던 절친마저 죽어버렸다. 사랑하는 여자는 뺀질뺀질한 놈과 동거 중이고, 솔로 앨범은 팔리지 않은 채 재고만 잔뜩 쌓여있다. 이 가치 없는 남자의 노랫소리는 어두컴컴한 술집과 퍽 어울린다. 길 잃은 고양이와 다를 바 없는 구슬픈 인생은 언제 끝이 나려나. 잔뜩 몸을 웅크리고 꿈이 사그라드는 꼴을 맥없이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르윈 데이비스'는 누구보다도 시린 겨울을 보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내가 유독 좋아하는 장면은 르윈이 터벅터벅 길을 걷는 신들이다. 추워서 얇은 외투를 여미지만, 도무지 이 겨울은 그를 용서할 맘이 없어 보인다. 이제 그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 줄을 훌쩍 넘어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할 것이다. 르윈은 요즘 들어서야 현실과 꿈의 거대한 균열을 깨닫고 있다. 매번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무대에 오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과연 여기보다 어딘가에 더 나은 인생이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르윈은 유독 실수가 잦고, 인생의 고비마다 미끄러지는 친구다. 그런데도 <인사이드 르윈>의 여정에는 시궁창 같은 삶에서 건져 올리는 희미한 낙관이 있다. 난 바닥을 치는 르윈의 실패담에 가차 없는 위로를 받았다. 모두 전망이 없다고 손사래 치는 데 몰두하는 녀석의 옹고집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그렇게 살 거거든.' 난 남은 인생도 가감 없이 글쓰기에 탕진할 것이다. 우리 형이 사들이는 그 비싼 옷들처럼 아까운 줄 모르고 흥청망청 노트북을 열고 밤을 지새울 태세다. 르윈이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시카고의 한 공연장에서 오디션을 본 것처럼, 무시와 기만을 뒤로한 채 승산 없는 인정 투쟁에 몰두할 생각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위로가 되는 것을 적어볼 생각이다.


 난 <인사이드 르윈>를 아버지와 관람했다.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와 단둘이 외출한 참이었다. 좋은 영화를 고르고 싶었고, '이수 아트나인'엔 코엔 형제의 신작이 걸려 있었다. 극장을 나와 아버지와 근처 초밥집에서 전에는 하지 못했던 얘기를 나눴다. 밤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갈 때 코엔 형제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아버지가 르윈이 부른 노랫말을 따라 부르시는 것을 들으며 운전을 했다. "Hang Me, Oh Hang Me~" 난 운전대를 두드리며 앞으로 이 영화를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가 떠오르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르윈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밥 딜런보다 먼저 공연하고 무대 밖으로 나선다.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괴한을 만나 실컷 얻어터진 르윈은 아무런 구원도 없이 버려진다. 영화는 그를 훼손시키며 가차 없이 끝이 난다. 고양이가 복잡한 여정을 거쳐 결국 무사히 집으로 온 것처럼 르윈 데이비스 역시 다시 무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양이 이름이 율리시스라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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