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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Sep 17. 2020

피하고 싶은 질문들

#26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당신은 이제 어떻게 살 것인지 질문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나탈리는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이곳은 가족들이랑 함께 온 낯선 여행지. 나탈리는 마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려는 듯 창밖을 보며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남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다가오는 것들>은 내게 곧 닥쳐올 것들에 대해 미리 질문하는 영화였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 투성이지만 그래도 난 영화가 던진 물음에 하나둘씩 답해보려 한다.


 나탈리의 일상은 두 아이의 엄마이자 철학 교사, 철학 교과서 필진, 노모의 딸, 자신과 같은 교수인 하인츠의 아내, 중산층이자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일까지 더할 나위 없어 보인다. 이런 역할을 위대한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맡고 있어서인지 아름다움이라는 말의 어감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 그녀에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떠나가는 것들이 생긴다. 20년 넘게 해로한 남편의 외도, 두 자식의 독립, 노모의 죽음, 오랜 시간 동안 헌신한 교과서 집필진에게서의 탈락 그리고 그녀가 오랜 시간 가꾸던 정원(추억)과의 작별이 그것이다. 여자는 40살이 넘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한심한 치들은 여전하다. 그녀의 가려진 두 귀에 던져지는 말들이 더없이 가혹하게만 느껴진다.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듬성듬성 비어버린 서가처럼 그녀가 믿던 세상까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 앞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은 그녀를 썩은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비겁한 지식인으로 취급한다. TV에서 열심히 변명해대는 ‘사르코지’나 부츠를 신고 침대에서 기행을 벌인 ‘시라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그녀를 대한다. 내내 덤덤하던 그녀는 침대에 누워 늙은 고양이를 어루만지며 내키지 않는 눈물을 흘린다. 좀 더 살펴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스스로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믿고 있던 나탈리는 가장 아끼던 제자 파비앵이 자신을 문서에 사인이나 하며 젠체하는 보수적인 엘리트 지식인으로 취급하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도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로 살며 소련에서 솔제니친의 정신을 찾았던 사람이지만, 그런 시간은 이제 지나가고 없다. 그녀는 말한다. “급진성을 논하기엔 너무 늙었다. 예전에 이미 다 해봤다.” 그녀는 지금 명백히 밀려나고 있다. 내가 나이를 들었다고 느낄 때는 언제일까. 내 육체와 정신이 시들해지고 그걸 못 버틴 내 사랑이 떠나가는 순간이 아닐까. 내게도 다가올 그런 시간을 미리 경험하는 기분이 들어 마음 편히 그녀의 처지를 바라볼 수 없었다. 나탈리를 응원하는 마음과 동시에,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경고가 귓가에 울린다.


 나탈리와 파비앵의 관계가 흥미롭다. 두 사람은 남편의 외도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다. 나이 차가 나는 두 사람이 친구처럼 연인처럼 학문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견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회 정치 의제를 포함한 어떤 주제든 터놓고 자기 생각을 내놓는 데 어려움이 없다. 긴장과 당위가 있는 학문적 동지처럼 보였다. 모든 걸 꺼내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소중하다. 그건 가족이 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고, 오직 친구나 연인으로 정의하기도 뭐한 관계다. 가끔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내가 열리는 기분이 들고, 고민하는 걸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나탈리가 제자 파비앵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장면을 유심히 봤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두 사람의 대화가 시종일관 흥미롭다. 난 그들이 세상을 어찌어찌 바꿔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는 걸 멀찍이서 구경했다.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 자그마한 선의를 통해서라도 그걸 고쳐보겠다는 열의가 낯설었다. 늘 사변적인 글을 쓰면서 내 안위만 살피느라 바쁜 내게 그들의 대화는 신선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이 사회에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철학이 사유하는 바를 어떻게 일상에 녹여야 할지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다가오는 것들>을 몇 년 전에 보고 잊지 못하는 건 삶의 충격에 대응하는 그녀의 덤덤한 태도에 있다. 현시점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는 우선 일선에서 물러난다. 낡은 차에서 듣는 ‘우디 거스리’의 포크송과 젊은 친구들이 내는 변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의 변화에 귀를 기울인다. "애들은 독립했고 남편도, 엄마도 떠났지. 나는 자유를 되찾은 거야.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온전한 자유. 놀라운 일이야." 손실과 함양을 동시에 취하는 그녀의 태도는 존엄한 노년을 고민하는 내게 희미한 빛처럼 다가왔다. 나탈리의 책장에 새롭게 채워질 다른 철학서들은 무엇일까. 유나바머를 실천적 지식인으로 믿는 젊은 친구들이 나이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것도 늙은 지식인의 역할일 것이다. 또한 지하철과 카페에서 읽는 책들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도 그녀에게 중요하다. 나탈리가 너른 들판에서 책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찍은 수평 트래킹 장면을 좋아한다. 그녀는 자신을 흔드는 문제들을 뒤로하고 다시 서가에 서서 고민한다. 그녀는 한시름 놓을만한 나이에 이르러서도 책을 펴고 세상 돌아가는 꼴을 기민하게 살핀다. 나탈리는 삶에 닥친 위기를 도피가 아닌, 자신이 구축한 사성적 기반 내에서 극복해 나간다. 그 기반이란 평생의 독서와 고민, 집필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는 가뿐한 걸음걸이로 책을 들고 어딘가로 나선다. 부대끼는 것들을 뒤로하고 독서와 글쓰기로 고통 속에 휩싸인 제 삶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즐겨 앉던 원목 탁자 위에 화병을 놓고 뭔가를 적어나간다. 그녀의 집 안을 가득 채운 책들과 얕은 조명이 고즈넉하다.


 나탈리는 고등학교 수업에서 < 엘로이즈> 일부를 강독한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행복 없이 지낼  있다. 행복이 도래하지 않으면 희망은 지속한다.  근심에서 나오는 일종의 쾌락은 현실을 보완하고  낫게 만들기도 한다. 좋은 세계를 향한 희망은 좋은 세계를 대신할  있다.” 다소 나이브해 보이는  말은 교실을 맑게 깨친다. 다들 아닌 척하지만, 눈에 촉촉한 기운이 서린다. 창밖에서 햇살이 비추고 교육과정을 개혁해야 한다는 시위대가 소리가 요란하다. 수업을 듣는 아이들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래도 믿는 바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살면서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으로 결혼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직업이 보수적이고 집단생활을 하는 내가 결혼이라는 제도 내에서 행복하긴 어려워 보였다. 기성의 강요에 굴복해서 백기를 드는 거로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누가 결혼한다고 하면 마치 뻔한 사람을 바라보듯 뻔한 인생이네 하며 비웃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으로선 소름 끼치게 부끄러운 생각이다.  일상이  긍긍하며 불안하니까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지금처럼 글이나 쓰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가끔 밥이나 먹으면서 놀고 싶었다. 그리고 주말 아침이면  읽고 싶은 책이 그득한 일상을 그렸다. 하지만 인생은  생각처럼 흐르지 않는다. 근심만 하다가 놓친 가능성의 세계를 애달파하며 잠을  이루기도 한다. 행복이 도래하지 않은 상태를 희망으로 보기 어려운 새벽 밤이 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밤을 흘려보내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더라.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무언가를 그려낸 영화를 보고 나면 벅찬 느낌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이 자리한다. 그건 세상은 아직도 내가 알지 못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경외감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들춰봐야 할 것들이 내 지적 허영심을 부추긴다. <다가오는 것들>은 샤토브리앙, 루소, 아도르노, 솔제니친, 호르크하이머, 부버 등 평소 관심도 없는 여러 사상가의 문헌들이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철학 교사이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지적인 사유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전가의 보도 같은 얘기지만 어느 예술이 그러하듯 당신의 부박한 삶에 당대의 철학 사유들이 구원의 동아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서가에 꽂힌 한 권의 책이 위기에 처한 당신을 구해낼지도 모른다. 영화는 결코 뻔한 맺음을 거부한다. 그녀는 다시 집으로 찾아온 남편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혼을 자책하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에게 비수를 꽂은 파비앵의 집에 다시 방문해 완전한 독립을 기념이라도 하듯 어머니의 검은 고양이를 선물한다. 이제 그녀는 혼자다. 자기 고집에 귀를 막은 늙은이의 부박함도 아니고, 스스로 젊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자책하는 삶도 아니다. 나탈리는 적당히 듣고 자신을 간직한 후 유려한 걸음을 이어나간다. 지적인 품위를 갖춘 그녀를 생각하고 또 적어보는 이유다.


 내 영광의 시절은 언제였을까. 앞으로 뭔가 더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뜨거웠던 게 많이 식었다. 난 강백호처럼 지금이 내 전성기라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영원히 머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기는 첫 책을 내기 전이다. 멋모르는 치기로 가득 찼던 상태가 그립다. 책만 내면 뭐든 다 할 수 있었고, 세상이 내 책에 찬사만 보낼 것 같았다. 글을 쓰면서 과거 연인들이 내게 안겨준 행복과 고통, 내 삶을 통틀어서 기억할만한 어떤 순간을 적었다. 근데 한 권의 책에 내가 가진 경험을 털어내고 나니 이제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기엔 그럴만한 식견이 없어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마 그때부터 더 열띠게 여러 방면을 찾아 읽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건 한정적이라 카페 한 귀퉁이에 앉아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건 책뿐이었다. 작가 김연수는 인터뷰집 <작가는 무엇인가> 추천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소설가는 불꽃이 다 타버리고 재만 남은 뒤에도 뭔가를 쓰는 사람이다. 이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다 타버렸으니까. 이제 그는 아무도 아닌 존재다. 소설을 쓸 때만 그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김연수는 첫 책을 낸 작가를 '그을린 이후의 소설가'로 칭하며 이제 더는 쓸 게 남지 않은 작가가 아무도 아닌 존재로서 뭔가를 더 써나갈 때 비로소 작가에 이른다고 말한다. 누구나 한 권의 책은 쓸 수 있지만, 이제 두 번째 책을 내야 할 때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야 한다. 이제 내 얘기가 아니라, 타인을 상상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제 난 뭘 써야 할까. 내가 믿는 건 가방에 담긴 책과 노트북뿐이다. 쌓고 쌓다 보면 뭔가가 보일 거라는 믿음으로 어제와 같지 않은 오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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