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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7. 2021

순수를 잃은 자들까지 품어낸 도시

#24 뭉크는 절규에 왜 그런 말을 남겼을까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절규>의 비밀이 풀렸다고 한다. 이 오래된 그림에 무슨 비밀이 있다고 난리일까. 쭉 읽어보니 그림 왼쪽 구석에 희미하게 적힌 메모가 있었는데, 그게 화가 본인이 쓴 것이라고 밝혀졌단다. 뉴스거리 맞는 거지? 원래는 어떤 놈이 낙서해 놓은 줄 알고 분개했는데 필적 확인 결과 뭉크의 소행이 확실하다고 한다. 거장이 그림에 낙서나 하고 말이야. 요즘엔 연구자들이 적힌 문구가 어떤 의미인지 설왕설래 말을 만드는 중이란다. 연필로 적은 것처럼 보이는 메모에는 “미친 사람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Can only have been painted by a madman)”이라고 적혀 있다. 그가 평생 우울증과 신경과민에 시달려 왔다는 걸 상기해보면 이해가 가는 말이다. 난 어쩐지 메모에 온점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사실 이런 그림을 그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미쳐버린 까닭에 어쩔 수 없었어. 그냥 그렇게 그려져 버린 거야.’ 난 저승에서 인터뷰를 하는 뭉크를 상상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력하고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중얼. 말을 맺지 못하고 끝을 흐리는 지독히 어두운 남자.

뭉크 <절규>

 뭉크는 무엇에 절규했을까. 그림 속의 남자는 뭐라고 뇌까렸으려나. 악몽일까. 틈만 나면 빌어먹는 꼴같잖은 것들 때문일까. 구역질 나는 속물성이 마음에 안 들었나. 다들 정상인의 범주에서 싹싹하게 사는 게 영 못마땅했을까. 제 귀에 도청 장치가 달려있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그림 속의 남자는 아마 비명을 지른 후에 텔레비전이 꺼지는 것처럼 쓱 하고 증발해버렸을 것이다.

 뭉크는 <절규>를 연작으로 네 작품이나 그릴만큼 공을 들였다. 속절없는 인생. 그는 유부녀와의 첫사랑에서 버려졌고, 또 다른 연인은 총을 쏴서 그의 오른손 중지를 날렸다. 가족들은 일찍이 다 죽어버렸고 저 자신도 평생 골골대며 살았다. 몸이 약해서인지 절규를 그릴 때 환영에 시달리며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두 친구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 해가 지고 /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슬픔의 숨결이 느껴졌다 // 가슴 아래로 찢어질 듯한 고통이 / 나는 발길을 멈추고 담벼락에 기댔다. 죽을 듯이 피로했다 / 피의 협만 위 구름에서는 핏방울이 떨어졌다 / 친구들은 계속 걸었지만 나는 불안에 떨면서 난 가슴속의 아물지 않은 상처 때문에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자연을 꿰뚫고 지나가는 거대하고 기이한 절규를 들었다"(책 에드바르 뭉크, 을유문화사 발췌)

 

 뭉크의 <절규>를 보고 있으면 영화 <박하사탕>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래 <스크림>도 떠올라) 미쳐버린 남자가 대뜸 기찻길 위로 올라가서 목숨을 던진다. 뭐라고 사납게 고함을 치고 있다. 잘 들어보니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것 같다. 그건 절규라고 불러야 마땅한 애타는 고함이다. 애걸에 가까운 호소로도 느껴진다. 그의 이름은 강철중, 아니 김영호다. 그는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죽으려는 걸까. 대체 어디로 가고 싶다는 걸까. 그의 절규에 화답하듯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되감기를 한다.


 영화는 남자를 순수했던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그가 어떻게 현대사의 괴물이 되어가는지 하나씩 짚어간다. 온갖 폭력에 시달렸고 본의 아니게 더럽혀졌고 나중에는 누군가를 부러 더럽힌 남자. 순수를 잃고 비열한 거리를 걸었던 개자식. <박하사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은 그가 권총을 들고 사냥감을 찾는 장면이다. 영호는 제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는다. 내 인생을 망쳐버린 한 놈만 죽이고 자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자 누구를 죽일까. 후보를 꼽아보자. 사기 친 놈, 바람피운 놈, 날 해고한 놈, 타락한 놈, 인간말종, 쓰레기, 변절자, 위선자. 이거 셀 수가 없네. 대체 누구의 머리를 날려야 잘 죽였다고 염라대왕께 칭찬받을 수 있을까. 결국 그는 한 놈을 정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의 인생이 고꾸라지기까지는 너무도 많은 개새끼가 있었다. 삶이 너무나 복잡해서, 아니 단순하지가 않아서 미쳐버린 걸지도 모른다. 영호가 기찻길 위로 몸을 내던지기까지는 우연도 필연도 아닌 어떤 숙명적인 사슬이 얽혀있다. 뭉크 가라사대 “미친 사람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

이창동 <박하사탕>

 스티븐 핑커는 노작 <우리 문명의 선한 천사>에서 인류의 폭력이 감소한 이유를 인간 본성이 내재한 4가지 선한 천사의 노고라고 말한다. 그 네 가지는 감정이입, 자기 통제, 도덕성, 이성이다. 다 같은 말 아니야? 아니란다. 이 각각이 비틀스를 구성해서 우리 마음속에 사는 악마들을 물리친다는 논리를 편다. 저자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온갖 지식을 동원한다. 아는 게 얼마나 많은지 심리학, 진화심리학, 게임이론, 뇌과학까지 닥치는 대로 끌어와서 책이 거의 목침만큼 두꺼워졌다. 그래서 물론 다 읽지 못했다. 관상용으로 책장에 꽂아두면 폼나는 책이다.


 네 명의 천사 중에서 '감정이입'이 거의 존 레넌 급이다. (이성이나 도덕성은 고작 링고스타 급이다) 타인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해보려는 노력 자체가 문명화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런 감정이입의 대표적인 훈련 도구가 예술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화가의 그림을 보며 희미한 연상에 젖고, 소설을 읽으며 그 사람이 되어보는 과정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저명한 학자께서 예술을 즐기는 게 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해주니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내가 YES24 골드회원인 것이 문명화 과정이었어)


  거의 매일 누군가의 실패로 이뤄진 작품들을 본다. 내가 알기론 예술이라는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작가는 관람객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이들의 고통을 감히 상상이나   있겠소?' 나는  없이 대답한다. '아니요.'  하나 건사하기도 빡빡한데 누가 누굴 챙겨요. 근데 예술은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가장 쉽고 값싼 통로다. 이해하는 척 다 아는 척하기에 괜찮은 방법이다. 요즘엔 고전으로 이름난 작품도  구글에 나오니까. 영화나 책은 말할 것도 없다. ' 번은 없는 것과 같다'라는 독일 속담처럼,   번뿐이라 사는  사는  같지 않은 인생에 있어서 예술은 실전과 가장 유사한 환경을 제공한다.  책장 하나만 넘기면  남자의 그늘진 등허리에 담긴 어둠에 대해 생각해   있다. 뭉크의 그림 속에서 영문을 모르게 절규하다가 인생을 종친  남자의 심정을 이해해보려는 인파가 매일 노르웨이 오슬로 미술관을 찾는다. 다들 문명에 한줄기 보탬이 되려고 애들 쓴다.


 나는 올해 서른여섯이다. 세월이 생각보다 많이 흘렀고, 점점  빠르게 지나가는  느낀다. 나는 종일 무엇이 좋고 괜찮은 선택인지 고민하며 산다. 내가 배제해서 버려진 선택지가  뜻하는지, 어떤  앗아간 건지도 모른  흘려보낸다.  수많은 우연의 진자운동 속에서 내가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없어질 가능성만 축내고 사는 셈이다. 그래도 나는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 이제 시간이 흐를수록 선택의 폭은 점점  비좁아질 거고, 내가 놓친 갈림길은  수도 없이 불어날 것이라는 . 그걸 알기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려고 노력한다. 시간을 펑펑 갖다 쓰던 스무  때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고작 방구석 침대로 비좁아질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후로는 썩고 병드는  빼고는 크게 변화할  없다. 그러다가 마지막 선택지마저 그르칠  뻔하고, 이제까지 쌓아온 삶이  땅속으로 사라지는  지켜봐야  운명이다. 그게 너무나 두렵다. 그래도 결국엔  내가 택한 삶이니 감당할  있을 것이다. 죽음으로 농담을 삼을  아는 어른이고 싶다.  가방 속에 소설책을 담고 다니면서 <007   산다>처럼 다른 삶을 엿보는데 만족한다. 나도 문명화에 살짝 발을 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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