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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2. 2021

투기의 시대에 땅 한 뙈기 없이 산다

#27 투기의 시대에 세잔을 생각하기

 아침에 샤워하며 어젯자 뉴스를 듣는데 귀를 사로잡는 보도가 나왔다회사 내부정보로 투기한 이들이 도마 위에 올랐는데 신입사원의 말이 가관이었다입사한  6개월  그는 거액의 빚을 내서 신도시 예정지에 투기했다땅값이 올라 앞으로   있는 돈이 평생 월급보다 많을 거라고 장담했다돈만   있다면 회사에서 잘려도 된다는 투였다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어떤 비난도 상관없어 보였다도덕적 지탄은 잠시뿐이지만 부동산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명예나 위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통장 잔고는 확실한 표식이니까. 심신의 안정과 자식의 여유로운 생활까지 고려하면 그깟 비난쯤은 감수하겠다 이건가누군가는 한몫 챙긴 저이의 삶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도지질을 치며 부러움 쪽으로 머리가 기울지 않도록 고쳐잡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출근이나 하자고 다잡았다. 그가 보인 호방한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얼마 전에 읽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출퇴근 전철 안에서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인생의 절정기는 학교 축제 때뿐이었음을 절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자유를 스스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인터뷰한 신입사원의 속내가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저 노예처럼 사는 게 싫었던 걸지도. 지긋지긋한 출퇴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일지도. 내가 돈 많은 부자가 되길 애초에 꿈도 꾸지 않은 경우라면, 그는 어떤 방식이든지 수저 색을 바꿀만한 돈이 필요했을지도. 나는 불로소득과는 무관한 삶을 택했지만, 그는 한몫 챙겨서 일확천금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었을지도. 그렇다 다 추측뿐이다. 영화 <기생충>이 떠올랐다. 투기를 한 신입사원은 밸런스 게임을 하면 평생 사기나 치며 살았던 기택처럼 무일푼에 남의 집 기사 노릇이나 하는 삶보다는, 칼에 찔려 죽더라도 때깔 좋은 박 사장 얼굴을 떠올리며 팻말을 들 것이다. 


 제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라는 책으로 명성을 얻었다. 성과를 중시하는 시대의 불안에 대한 이 책은, 현대사회를 억지 긍정의 신호를 스스로 주입하는 착취 구조로 분석했다. 그리고 그 근간에는 집단주의 문화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우린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단적인 가치를 우선시하는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 개개인은 반발감은 최대한 누르고 찍소리 없이 조직의 지시에 순응했다. 밝고 낙천적인 태도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식으로 웃겨 넘겼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지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긍정주의를 탑재한 예스맨들의 시대도 이제 저물어 가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성과만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이제 드물다. 조직은 내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주위 친구들은 근거 없는 희망을 혐오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굴다간 팩트 폭행에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대책 없는 노력을 강요하면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다. 이제는 명분이 있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짙어진 개인주의가 서로 간의 거리를 벌렸고, 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맥락과 당위를 마련한 사람들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최근 글쓰기 인구가 많아진 것도 같은 흐름 안에 있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매체는 말할 것도 없다. 내 목소리로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증명해낸다. 다른 이가 아닌 스스로 이해하기 위한 과정처럼 보일 때가 많다. 좋은 현상이지만 지나치게 위악적인 면도 없지 않아서 스피커를 줄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속도전에 올라탄 정신없는 생활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과거엔 일에 완전히 파묻힌 도시인이 번듯해 보였지만, 이제는 잘 길든 노예로 여긴다. 잠시 멈춰 세우고 즐길 만큼 즐기고 가자는 목소리가 잘 들린다. 어릴 적에 지겹게 듣던 '내 집 마련의 꿈'이라는 말도 더는 내 가치에서 사라졌다. 시제가 미래에서 현재로 이동했다. 막연한 미래보다 오늘 밤을 더 중요하다. 취향을 위해 투자하고, 닥치지도 않은 일로 고민하지 않는다.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과거엔 미래의 궁핍함이었다면 이제는 오늘 밤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걸 경계한다. 시제를 바로 앞까지 끌어당기자 돈을 덮어두고 모으기보단 현재에 투자한다. 지루하지 않으려는 싸움 정도?


 부모님이 박봉을 쪼개 적금을 붓고 그걸 아파트 중도금으로 넣어 내 집 마련의 감격을 이루는 걸 옆에서 목격했다. 그런 대하드라마에는 인고와 고난의 세월이 존재한다. 나도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요즘 변화하는 추세를 보며 나로서는 달가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번듯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에서 놓여났다. 운 좋게 시류에 잘 올라타 '혼자'라는 가치를 보장받았다. 거창한 포부 없이도 조용히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 내 집 마련은커녕, 향후 십 년 후도 잘 모르겠지만 대신 책을 떠받들며 산다. 통장 잔고보다 문화 자본에 투자하고, 무형의 가치를 더 우선시한다. 과거엔 건물주가 부러웠지만, 지금은 신형철 같은 미문가를 더 우러른다. 물질적인 것을 속물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보다는, 물질적인 데서 우위를 가질 가능성이 없으니, 늦기 전에 포기하고 정신적인 것으로 눈을 돌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가끔 멋드러진 집을 가면 나도 투자를 해야하나 압박을 받기도 한다. 경사진 지붕이 앞쪽 벽을 따라 높은 창문으로 이어지고, 채광이 좋은 큰 복도에 빛을 받아들이는 걸 구경하는 가족들. 해가 호를 그리면 빛이 벽을 씻어내려 모두에게 비춘다. 심지어 거실에 있는 작은 가구들도 다 짜 놨다. 창문들이 있는 서쪽 벽 앞에는 작업실로 만들어서 거대한 탁자를 놓고, 거실 귀퉁이에는 소파와 커피 탁자가 놓인다. 침실에는 우리 둘을 기다리는 커다란 침대가 있고, 벽 쪽엔 붙박이 책꽂이가 내가 책 좀 읽는다는 걸 뽐낸다. 난 천천히 걸으며 성공의 맛을 음미한다. 하지만 이런 집을 소유하는 꿈도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다 깨졌다. 집 하나를 사려고 제태크를 공부하느니 그 시간에 난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 더 읽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술자리에 가면 친구들과 주식, 차, 아파트 분양권, 비트코인, 싸게 나온 땅 얘기를 한다. 나는 거기 끼지 못하고 먹태나 씹고 앉아있다. 나는 잉여의 얘기를 더 좋아하니까. 틈이 나면 연애 얘기를 꺼내려고 입맛을 다신다. 나는 그냥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10년이 훌쩍 넘긴 샐러리맨을 청산하고 히피처럼 세상을 떠돌며 소박하게 살 순 없을까. 아파트도 차도 땅도 다 필요 없는데. 최근 넷플릭스에서 미니멀리스트에 대한 콘텐츠를 찾아보고 있다.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의 조언에 따라 틈만 나면 세간을 갖다 버린다. 감당해야 할 노동을 줄이기 위해 소비 규모를 줄이는 데 신경을 쓴다. 매일 책을 읽고 헬스장에 가서 샤워하고 유유낙낙 이런 글이나 쓰려면 상시 최소 사양을 유지해야 한다. 소비 욕구를 줄이는 건 힘들지만 하고 싶지 않은 걸 안 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결국 돈과는 별 인연이 없는 삶을 살 거란 말이다.


 월급을 받는 사무실, 방세를 내는 자취방, 커피를 주는 스타벅스 외에 내가 유일하게 매월 세를 내면서까지 사용하는 공간은 헬스장뿐이다. 사무실 자리도 좁고 방도 좁고 스타벅스는 우글거려도 헬스장은 항상 내게 한갓진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물론 새해가 되거나 여름휴가 시즌이 오면 득실거릴 때도 있지만 내가 다니는 헬스장은 늘 장사가 안돼서 내가 여유 있게 공간을 쓸 수 있는 도시의 드문 장소다. 나는 프레데릭 바지유라는 작가의 <콩다민가의 화실>이라는 그림을 좋아하는데, 1870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내가 느끼기에 바지유가 작업실을 자랑하려고 그린 것 같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쳤던 바지유는 모네, 마네, 르누아르, 시슬레 같은 화가들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즐겼다. 그의 작업실은 창문이 높고 벽에는 건강한 여자들의 나체화가 걸려 있다. 어쩜 예술가들에게 꿈과 같은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창문으로는 파리의 값비싼 주택이 눈에 들어오고, 그는 왕성한 창작욕이 자랑하듯 벽마다 그리다 만 그림을 세워놓았다. 난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내가 헬스장을 바라볼 때 느끼는 부유한 감각을 떠올린다. 헬스장은 없이 사는 내가 누리는 가장 큰 사치니까. 나이키 운동복을 입고 놀이동산에 간 사람처럼 기구를 타며 돌아다니는 행위에서 유한계급의 여유를 느낀다. 스타벅스가 내 작업실인 것처럼, 헬스장은 내가 여유를 부리는 드넓은 살롱이다. 


 최근 현대미술에 관한 두꺼운 책을 읽었는데 알면 알수록 그 깊이에 대한 욕구가 충만해진다. 연이은 지적 호기심이 없다면 내일 아침이 꽤 두려울 것이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도 호환마마가 아니라 권태다. 이 많은 책과 영화가 지루해지면 어쩌지. 하루아침에 글이 쓰기 싫어지면 난 뭘 믿고 살지. 삶을 이루는 사상적 기반이 부실하면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현대미술은 내가 파고들만한 틈새가 있었다. 근데 어떤 책을 펴봐도 현대미술의 시작은 세잔이라고 하더라.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고 영향을 끼쳤던 사람. 조용한 생활과 사색을 즐겼던 폴 세잔은 생빅투아르산위에 올라가 경치를 한없이 구경했다. 그는 정물을 볼 때도 그 향기까지 볼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세잔은 꼼짝하지 않은 채 눈이 머리에서 튀어나올 때까지 그저 바라만 봤다. 그는 말했다. "풍경은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세잔은 조용한 공간에서 편한 옷을 입고 모든 걸 멈춰 세운 채 어느 것에도 시달리지 않는 상태로 살았다. 땅 한 뙈기 없이도 잘 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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