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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5. 2021

클래식 FM이 주는 값싼 우아함

#29 수신료의 가치는 어디에

 보도를 통해 KBS 수신료를 올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텔레비전이 없는 나는 계속 미뤄왔던 수신료 해지를 위해 KBS에 전화를 걸었다.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전력으로 재차 전화를 걸었다. 여기서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조금 흥분한 나는 다시 양쪽에 전화를 걸어봤다.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왜 서로 일을 미루시냐며 해결방법을 요구했다. 하지만 말은 빙빙 돌 뿐이었다. '한전에 거세요. 한국방송에 거세요.' 삼자대면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답답함을 머금고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았다. 여기서도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정말 텔레비전이 없는 게 맞느냐는 의심 섞인 질문이나 들었다. '전 넷플릭스 보거든요!' 공손함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한·중·일 외교전략이 왜 번번이 빗나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흑화 되기 전 가까스로 성질을 죽이고 문밖으로 나섰다.


 누리지 못한 수신료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느껴보려고 부엌 싱크대 옆에 붙은 라디오를 켰다. 주파수를 93.1 KBS 클래식 FM으로 맞췄다.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슈만'의 <사육제>가 들렸다. 언제 들어도 맑고 산뜻한 '루빈스타인'의 피아노 연주였다. 오늘은 분노의 내관을 건드려서인지 묵직한 '아돌프 제르킨'의 연주가 더 끌렸다. 물론 아이폰으로 멜론을 켜면 바로 제르킨이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단호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사육제를 연주해줄 것이다. 건반 하나하나에 힘을 주고 음계를 장조에서 단조로 바꿔가며 멋들어지게 칠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수신료의 손해를 꼭 만회하겠다는 피해 의식을 십분 발휘해 서서 오늘은 클래식 FM만 듣기로 했다. '화를 삭이려면 카니발도 그냥 카니발이 아니라 요란한 가면을 쓴 베네치아 카니발 정도는 돼야 해.' 난 술과 고기 대신 단백질 셰이크를 마시며 바벨 컬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했다.


 평소에도 집에서 클래식 FM을 틀어놓고 일을 한다. 이름도 모르는 연주를 듣고 있으면 교양 있는 도시인이 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집안일을 할 때도 배경 음악으로 쓴다. 마치 김남주가 광고하는 아파트 분양 광고처럼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 앉아 클래식 선율을 음미한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의 전기현 평론가가 시청자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클래식 FM 애청자는 사연도 어쩜 그리 곰살맞은 지, 또 DJ의 목소리는 얼마나 은혜로운지,  한참을 듣고 있노라면 딱히 죄지은 것도 없는데 뭐가 됐든 뉘우쳐야지 생각한다. 그래 이 정도면 한 달 수신료 이천 오백 원어치 한 셈이야.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 권짜리 소설 <1Q84>에는 NHK 수신료를 받으러 다니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NHK는 일본의 공영방송이라 수신료를 걷는 직원을 별도로 고용했다. 수금원은 단순히 수금 업무에만 그치지 않고 텔레비전 보유 여부까지 감시하는 역할도 맡는다. 주변 이웃에겐 미움을 살 수밖에 없다. 엄연한 조세 업무였지만 일이 일인지라 고약한 꼴도 많이 당했다. 아버지는 가뜩이나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 타인에 의해 모멸을 당할 때마다 정신적인 타격을 받는다. 이를 곁에서 보며 커온 수금원의 아들 덴고는 공부도 잘하고 키도 큰 데다 운동까지 만능이라 동급생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수금 업무를 따라다니기 시작하면서 점차 외톨이가 되어간다. 가뜩이나 민감한 나이에 아버지와 집집이 돌아다니며 험한 꼴을 보니 아이는 점점 위축되고 만다. 아버지 딴에는 고약한 일을 좀 쉽게 풀어보려고 내린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덴고에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 부끄러움과 초라한 기분은 소설에서 덴고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한국에서도 과거엔 수금원이 세대마다 찾아가서 KBS 수신료를 받아냈다. 그러다가 대학생들이 편파 보도를 문제 삼아 수신료 거부 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부담을 느낀 정부는 수신료를 전기세에 포함하는 방식을 택했다. 제2의 덴고가 나오는 걸 막은 것 같아 다행이지만, 묻지도 따지지 않고 청구하는 방식은 좀 너무한 것 같기도 하다. <1Q84>의 마지막 3권에는 죽은 아버지의 초현실적인 환영이 나타나서 수금을 계속하는 섬뜩한 대목이 나온다. 수금을 다 끝내지 못하면 저승도 갈 수 없다는 듯 끝까지 문을 두드린다. 노동에 정체성을 빼앗긴 가련한 죽음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죽음과 세금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고 했다지. 나도 KBS 클래식 FM을 애청하는 이상 피할 수 없나 보다.


 내가 유일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곳은 지하철역이다. 며칠 전에도 열차 대기시간이 남아서 대형 텔레비전으로 뉴스를 봤다. 적절하게도 내가 낸 수신료로 만든 KBS 9시 뉴스였다. 작년 한 해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높아졌다는 보도를 했다. 특히 성탄절 즈음에서 유의미한 수치로 크게 증가했다. 앵커에 따르면 연말엔 외로움이 커지고 가족 간의 불화가 잦아져서 자살률이 증가한다고 한다. 작년 12월 국내 상담센터에 걸려온 전화만 만여 통에 이르고, 그중 상당수가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퍼뜩 나를 응대하던 상담원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들의 목소리엔 긴 시간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냉담함이 서려 있었다. 그 일을 수백 번 수천 번 해본 사람이 갖게 되는 기계적인 무심함이었다. 상담원은 감정노동이라고 불릴 만큼 고된 여건으로 악명이 높다. 사실 상담원들은 기업이 제공한 매뉴얼에 충실했을 뿐이다. 뭐든 생계를 우릴 지치게 하니까. 거는 쪽도 받는 쪽도 쉽지가 않다.


  오늘날 서비스 산업 전반에 번진 가짜 미소에 질려있다. 서울 곳곳의 레스토랑, 호텔, 백화점, 은행, 고급 술집까지 사실 지갑을 열면  단련된 서비스를 받을  있다. 그들 배운 미소로  반긴다. 눈은 미동도 없이  꼬리를 힘껏 늘어뜨린 그런 미소. 고용주의 요구에  맞추려는 계산된 화답. 고객을 좋아하는 척함으로써 고객만족 평가를 도모하려는 프로들의 교양. 서비스라고 불리는 그럴듯한 허울 뒤에 은폐된 감정. 가끔  미소들 속에서 극심하게 피로해질 때가 있다. 그것이 세상을 삭막하게 만든다고 어딘가에 말한다면 나는 심하게 뒤틀린 놈일까.(사실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엔 그런 가식에 가까운 미소 없이는 아무 것도   없다. 특히 일반 식당이나 상점이 유독 그렇다. 고된 노동자의 구겨진 얼굴은 소비자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 내가 비싼 데를  가니 이런 취급을 받는구나 자괴하게 된다. 인간적인 교감을 찾을 데가 부족한지 고작 서비스를 받으면서 너무 많은  바라게 된다. 기계적인 미소가 싫다고 고개를 젓던 나를 헷갈리게 만든다. 어쩔  그들의 프로의식 결여에 적개심을 느낀다. 별점 테러와 같은 수단으로 갑질을 하려 든다. 이것도 저것도 싫다고 떼를 쓰는 애가  기분이다.  형언하기 어려우면서  막히는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조차도 믿지 않는 진정성이라는 말로 눙치고 넘어가야 할까. 그런 생각을 견딜  없이 서글퍼진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보니까 옆에 새로 부임해 온 직원이 인사차 온 것이었다. 할 일이 태산인데 굳이 바쁜 월요일 오전에 오다니. 난 커피를 한 잔 내주면서 이런저런 안부를 나눴다. 짧게 응대하고 보낼 생각이었다. 그 역시 향후 업무에 기름칠해두기 위해 찾아온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이렇게 인사라도 해두면 나중에 전화로 협조하기 쉬우니까. 다들 그렇게 하고 사니까. 그래서 나는 마치 매뉴얼을 읽는 것처럼 의례적인 태도로 그의 사정을 들어줬다. 냉담함과 무심함을 숨기려고 애를 쓰며 맞장구를 쳤다. 마스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내 말투는 나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질 만큼 기계적이었다. 근데 조금 얘기를 나누다 보니 직원은 보기 드물게 세련된 말투를 지니고 있었다. 유머를 섞어가며 마침표 대신 물음표를 찍는데 능한 사람이었다. 나는 길게 답할 생각은 없었음에도 굳이 안 해도 될 말까지 해버렸다. 그는 노래방에서 '그대 안의 블루’에 화음을 넣는 것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 하나하나에 다정한 공감을 표했다. 어떤 말을 하든 허심탄회하다고 느끼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화의 농도는 더 짙어졌고, 어느새 소파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KBS 콜센터 직원 외에는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나는 어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터져 나오는 속내를 숨길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뻗어 나가던 대화는 커피가 동이 나면서 끝이 났다. 그는 신속하고 눈치 빠른 사람답게 퍼뜩 바쁘신 분의 시간을 너무 뺏었다면서, 대화가 너무 재밌어서 방해하고 말았다는 사과도 잊지 않았다. 그가 무안하지 않게 배웅하고 문을 닫았다. 아무런 기대 없이 시작된 인사치레가 KBS 아침마당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내 얘기를 너무 길고 자세히 한 것이 끔찍하게 후회됐다. 뭘 그렇게 떠들어 댄 거야. 그때 수신료의 가치를 자부하는 KBS 뉴스 앵커의 마지막 논평이 불쑥 떠올랐다. “크리스마스처럼 주위의 관심이 필요한 시기에는 먼저 전화라도 한 통 거는 작은 행동이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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