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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06. 2022

무엇으로부터의 사색, 무엇으로의 자유

신영복, 담론

 신영복 교수에 관한 얘기는 풍문으로 들은 게 다다.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팔팔한 이십 대 청년이었던 신영복은 육사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인재였다. 그는 독서 모임과 서클을 만들어서 활동했는데 그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반국가단체로 여겨져서 잡혀갔다. 너무 익숙한 얘기라 식상할 정도다. 그는 풍문 안에서 존재하는 사람이었지만, 막상 그를 책으로 접하고 나니 바람은커녕 돌멩이를 넣은 눈덩이처럼 묵직한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죽었지만, 난 이제야 그의 책을 읽고 그를 작가로 접했으니 그는 사후에도 자신의 목소리로 살아있던 셈이다. 독서 모임에서 지적 토론을 즐겼던 청년의 생명력은 그렇게 여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꽤 식상해 보이는 풍문 속에서 이십 년을 빼앗겼다. 어두컴컴한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스물일곱의 나이에 간첩이 되었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타들어 간다. 미래가 없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내일이 오늘과 다르지 않은데 밥맛이 날 리 없다. 그렇게 그는 이름만 들어도 되게 추운 서대문 형무소에서 젊음을 다 보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을 허비하는 게 응당해 당연해 보이는 감옥 안에서 사색을 했다. 누가 학자 아니랄까 봐. 누가 공부 잘하는 서울대생 아니랄까 봐. 누가 작가 아니랄까 봐. 생전에 신 교수님과 맥줏집에 놀러 간 사람들이 부럽다. 어떤 얘기를 들었을까. 사형수 썰, 독방 썰, 면회 썰, 무엇보다 그 비좁은 곳에서도 삶이 작동한다는 믿지 못할 얘기를 해주시지 않았을까. 감옥을 배움의 장으로 뒤바꾼 사람. 그는 전설이 될만한 자격이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누명을 쓰고 무기수가 된 앤디가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우리는 주말의 명화로 똑똑히 봐왔다. 똑똑히 보기보단 재방송으로 너무 자주 봤다. 왜 쇼생크 탈출이 재밌는가. 거기엔 일종의 안도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재난 영화를 보는 것처럼 타인의 속박을 보고 난 그래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한숨이 있다. 앤디는 속박당하던 죄수들에게 LP로 '피가로의 결혼'을 틀어주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그 결과 독방에서 한 달 넘게 빛 한 점 없이 보내야 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명장면은 수많은 죄수가 자유의 음악을 즐기는 장면이지만, 앤디가 독방에서 보내는 시간은 단 3초 컷에 불과했다. 자유는 짧고 처벌은 길었음에도 영화는 그 짧은 자유에 귀를 기울였다. 앤디는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고 누워서 LP판을 만진 걸 후회했을까. 그러니까 신영복을 읽는다는 것은 앤디를 보는 마음과 비슷했다. 그가 감옥에서 학문에 힘쓰고, 끝내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감동을 자아내는 신화지만, 정말 그 안에서 행복했을지 묻고 싶었다. 그가 만든 신화는 나와는 다른 전설적인 존재를 대하는 거리감이 있다. 마치 지미 핸드릭스 하면 떠올려지는 휘황한 이미지가 있지 않나. 어떤 숭배에 가까운 경외가 덧씌워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감옥에서 짓이겨졌던 순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은 살아남아 목소리를 전하지만, 문장 속에는 누추함이 없다. 오직 고결한 정신만 살아남았고, 난 그게 못내 아쉽다. 난 신 교수님이 생활의 냄새를 풍기며 신세를 한탄하는 것도 듣고 싶었다. 그렇지만 난 끝까지 신영복 교수가 바깥에서 자신이 가르칠 누군가를 떠올리며, 앤디가 LP판을 올리며 처벌을 각오하고 수많은 죄수들에게 예술적인 영감을 선사하는 순간처럼 자신의 지식이 어떻게 퍼져나갈지 상상하며 열심히 펜을 놀리는 장면을 상상해야만 했다. 이것이 내가 정의하는 전설적인 풍문의 실체다. 

 신영복 교수가 앤디와 다른 점은 손도끼로 벽을 파내서 자유를 찾은 게 아니라,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감옥에서도 학자로 살았다는 점에 있다. 그는 <담론>에서 자신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햇볕 때문이라고 말했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이 정도 마인드 컨트롤 없이는 무기수로 살기 어려울 것이다. 쌍팔년도에 광복절 특사에 포함되어 세상에 나올 때까지 그는 동서양을 고서를 넘나들면서 배우고 익혔다. 그의 지적 욕구는 감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그는 정신적인 자유로 사상범의 사슬을 풀어낸 셈이다. 그의 출소와 동시에 출간되어 지금까지 50만 부가 넘게 팔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 과정에 담긴 노작이다. 사형수로 살면서 얼마나 착실하게 읽고 썼는지, 자투리 쪽지에 적어 보관한 촘촘한 글씨들이 모여 어떻게 이런 두꺼운 책이 되었는지 수많은 이가 감탄하고 우러렀다. 그는 강의 <담론>에서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형식"이라고 단언했다. 누가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있을까. 컴컴한 옥에서 햇빛을 보며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청년의 꼭 쥔 손을 잠시나마 떠올려본다. 그래서 난 내용도 다 이해 못 하면서 마냥 그의 강의를 부처의 독경처럼 들었다. 그의 말처럼 육신은 죽었지만, 책은 어떻게든 전해지니까. 이런 사실을 떠올리면 난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정작 내 책은 절판 위기인데, 시간을 들여 읽고 쓴다는 행위가 지향하는 고지를 본 기분이다. 불운한 삶을 살았던 젊은이에게 품위 있는 죽음을 선서한 것과 동시에, 내가 저녁마다 어려운 책을 읽고 씨름하는 짓에 허영을 선물해준다.


 그의 마지막 강의를 정리한 <담론>은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동양철학은 아는 바가 없었고, 한자로 이루어진 단어들은 졸음을 불러왔다. 사서삼경에 나오는 말씀이야 다 옳을 줄 알았고, 노자 장자는 멋들어지게 인용할 때 외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문열 작가는 그 옛날에도 <시대와의 불화>라는 글에서 동양 사상가를 멀리하는 청년들의 태도를 비꼰 바 있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읽으면서도 사서삼경은 낡았다고 읽지 않고, 보들레르에게는 감탄하면서도 이하(李賀)를 아는 이는 드물다." 꼰대 같은 말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담론>을 읽으면서 지식 편식의 실체를 몸소 느끼면서 난 좀 침울해졌다.

 카프카의 말을 떠올릴 수 있는 순간도 있었다. 카프카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친구에게 이런 문장을 적었다. "책이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다." (카프카가 왜 외롭게 살았는지 알만하다) 신영복 선생도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을 독서에 비유했다. 무지의 뼈아픈 기분에 휩싸이기보다는 한자라도 더 재밌게 읽다 보면 얼어붙은 바다는 아니더라도 냉동실 얼음 정도는 깰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담론>을 읽다 지쳐 방황하던 나는 이해가 가는 부분만 쏙쏙 뽑아 읽으며 발췌독을 했다. 쾌락 독서여 영원하여라.


 '관계'의 중요성에 관한 대목에 꽤 짙은 밑줄을 쳤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이다.” 인상적인 문장이다. 고로 "관계없이 인식 없다"는 말이다. 난 이 말을 두 가지로 해석했다. 첫 번째는 지식의 관계성이다. 우린 3초 안에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간다. 더는 지식을 찾는 것은 큰 메리트가 없다. 며칠 전에도 술자리에서 '야 그거 영화 뭐더라. 멜 깁슨 나오고, 전기 감전되고, 여자 다 꾀는 그 영화 있잖아. 여배우가 누구더라. 금발에 지적인 여자.' 내가 몇 마디 뱉기도 전에 한 친구가 검색 신공으로 영화 제목을 댔다. 김이 확 빠졌지만 우린 그런 초고속 정보 접근 시대에 산다. 하지만 지식의 관계성에는 약하다. 관련 검색어로 몇 단계 타고 들어가서 나온 결괏값을 접근하려면 몇 번의 사고를 거쳐야 한다. 단편적인 지식이 온갖 분야와 맺어진 맥락을 모르고서는 풍부한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인식은 결국 생각의 씨실과 날실을 꿰어내는 솜씨에 있다. 맥락을 아는 자만이 새로운 지식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관계를 중시해야 하는 이유는 이 시대가 개인주의를 주창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가치를 추켜세우는 시대를 살아가기에 월든처럼 원룸에서 외따로 사는 게 용이해졌다.(코로나와 경기 침체가 부른 현상이기도 하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타자를 맞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오긴 오게 마련이다. 우린 직장에 출근하고, 온라인은 끝없이 맺어지기를 종용한다. 나 역시 한때 관계의 영향권에서도 멀어지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지금은 생각을 달리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이다. 히키코모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질 않았다. 영향 관계를 부정하는 학문은 현실과 먼 딴소리를 하게 마련이다. 지식은 쓰임이 있을 때 가치를 발휘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을 외면하고서는 무감각한 세상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대로 인플루언스 하지 않으면 지식은 곰팡이가 슨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 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243쪽) 학문의 상아탑 안에 갇혀 현실과 거리가 먼 소리를 뱉는 학자는 자기 안에 갇히고 만다. 시대의 교양도 이제는 정의를 달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세운 잣대를 누군가의 말에 영향을 받아 바꿔낼 수 있는 유연한 태도. 아마도 그것이 신영복 선생님이 말하는 관계의 가치 아닐까.


 오늘 읽은 글이 일상에서 번져나가고, 술자리에서 뱉은 개똥철학이 누군가를 감화하고, 누군가의 고충에 영혼을 싣는 추임새를 넣을 때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느껴진다. 누가 들으면 비웃을 일이지만, 난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면서 내가 일말이라도 세상을 더 낫게 한다고 믿는다. 그냥 내가 잘 놀려고 모인다고 말은 하지만, 속내는 사실 조금 더 촉촉하다. 책으로 이뤄진 관계, 문장을 끄집어내서 얘기하는 시간. 난 거기에서 내가 기여할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잠재성과 가능성이라는 말을 붙인다면 오그라들고,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 정도로 치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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