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향수>
출장차 종로에 갔다가 예전에 자주 드나들었던 정독 도서관을 찾았다. 난 한때 책가방을 메고 꼬박 한 시간이 걸리는 종로를 찾았다. 공부한다는 생각보다는 북촌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을 좋아했다. 특히 봄이 오면 더 그랬다. 한참을 걸어도 힘들기는커녕 보드랍고 연한 기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 곳곳에 위치한 한옥은 하나같이 작고 오래된 정원을 품고 있었는데, 난 남의 집 안을 멍하니 들여다보며 나도 커서 이 동네에서 살 수 있을까 생각했다. 옆에 있던 친구는 어려울 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단칸방이라도 좋으니 북촌에 집 한 채만 갖는 게 마냥 불가능한 꿈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봄 아닌가, 꿈도 못 꾸나.
정독도서관은 과거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신간 도서 목록에서 한 시인의 에세이를 꺼내 들었다. 독서도 봄을 타는지 멜랑콜리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말랑말랑한 문장을 건져냈다. 시인은 넓고 깊게 오래도록 관찰한 자신의 일상을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잘 쓴 에세이는 식어 가는 몸에 온기를 불어넣고, 잠들어있던 세포까지 일제히 봉기시키는 마술을 발휘한다. '버지니아 울프' 역시 에세이를 읽을 때 느껴지는 기쁨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적은 바 있다. “좋은 에세이를 읽을 때 우리는 모든 능력이 활발하게 깨어 즐거움의 햇볕을 쬐는 느낌이 든다. 또 좋은 에세이는 첫 문장부터 우리를 사로잡아 삶을 더 강렬해진 형태의 무아지경으로 빠뜨린다.” 난 그녀의 말대로 오래전 더벅머리 시절 정독도서관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훔쳐보았던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졸졸 따라가면서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포니테일 머리를 한 아이였다.
도서관 폐관 시간이 돼서 밖을 나서니 늦은 오후였다. 황혼 녘 찬란한 볕의 여운에 흠뻑 취해 돌아다니다가 작은 서점에 들어갔다. 센티한 감상에 젖어서는 창밖으로 뉘엿뉘엿 땅거미가 깔리는 걸 지켜봤다. 삭막한 도시가 여린 속살을 내비치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어둠이 슬그머니 들어섰다. 잔디밭의 푸른 기운도 은은한 잔영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어스름한 어둠이 스민 도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건물 틈새로 푸른 그림자를 삐죽거렸다. 난 몸을 비비 꼬다가 사랑에 관한 책을 모아둔 서가에 멈춰 섰다. 무작정 표지가 예쁜 책을 계산대에 올려놨다. 물론 책 속에 담긴 봄은 내 기분처럼 실실거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옷 속에 돌덩이를 넣고 우즈강에 스며든 때도 이런 봄날이었다. 흩어진 머리칼이 쨍한 햇볕에 엇비스듬히 가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에게는 그런 죽음도 봄이 다다르는 조짐이다.
도서관을 나서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갔다. 고작 두 시간을 세웠는데 만원이 넘게 나왔다. 서울에서는 운전에 관한 모든 것이 버겁다. 비좁은 골목길은 주차하기 번거롭고 꽉 막힌 도로에 서면 식은땀이 흐른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서울은 걸을 때 살만한 도시로 탈바꿈한다. 주말 오후 선선해질 무렵 이어폰을 귀에 꽂고 꽉 막힌 차로를 굽어보며 걸을 때야 비로소 서울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난 차를 몰아 서대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종로 일대를 산책하듯이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거리 곳곳에 묻은 내 흔적이 미처 의식할 새 없이 스쳐 지나갔다. 광화문 근처에 자주 갔던 김치찌개 집과 부암동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우산을 나눠 쓴 기억이 떠올랐다. 만두전골이 맛있었던 식당과 종각의 햄버거 가게에서 손을 씻다 문득 떠올랐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난 방향을 틀어 용산을 지나 이태원과 한남동 뒷골목까지 드라이브하면서 기억을 그려나갔다.
초저녁에 산책하는 기분은 산문을 읽는 것과 유사하다. 어느 장을 펼치면 일기처럼 감정적이고, 다른 장으로 휙 넘기면 시처럼 산뜻하다. 운율이 없이도 부지런한 걸음걸이가 리드미컬한 기분을 안겨준다. 남산 근처 골목에 차를 세우고 아기자기한 풍경이 밟아나갔다. 배가 너무 고파서 자주 가던 돈가스집을 찾아 나섰다. 신선한 바람이 부는 남산 풍경과 비좁은 골목길에 아기자기하게 자리 잡은 카페들이 사랑스러웠다. 평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없어서 더 좋았다. 어스름한 저녁 빛과 다정스럽게 사라지는 가로등 불빛이 소곤거리는 감정에 불을 지폈다. 기억과 풍경, 계절과 사람, 그 모든 아름다움, 혹은 외로움이 감정을 몽글몽글하게 구슬렸다. 이어폰에는 다소 각박해 보이는 서울 풍경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김정범의 재즈 피아노가 흘러나오자 어떤 그리움이 솟구쳤다.
늦음 밤이 되어서 집 근처에 차를 세웠다. 장거리 운전은 늘 지친다. 밤공기에 한기가 차올랐다. 이 추위가 단지 일교차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 근처 골목길에는 가로등이 드물게 있긴 했지만, 딱 보기에도 고집스러운 어둠이 완강했다. 나는 어둠이 붙들세라 빠른 속도로 걸어 나갔다. 모퉁이를 돌자 가로등이 사라졌고, 어둠이 한층 깊어졌다. 근처 건물에서 여리고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가까이 다가서니 화목한 가족들의 목소리가 꺄르륵거렸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어둠의 가장 안쪽에서 영문 모를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종일 나를 휘감던 향수의 감정들이 다 꿈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