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몸>
휴가의 꽃은 월요일 아침이다. 모두가 죽상을 하고 출근할 때 늘어지게 자다가 오후 열 시쯤 스타벅스에 들어서면 그 강렬한 에어컨 바람만큼이나 심신이 상쾌해진다. 너는 지하철로 내려가는데 나는 너희 뒤꽁무니를 따라가지 않는다. 아주 단순한 논리다. 아무도 내게 그곳에 가라고 떠밀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기를 쓰고 가려고 했으면서 어쩌다가 가지 않으면 그렇게 살 것 같다. 잠을 충분히 자면 몸이 왕성해서 진짜 사는 것 같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출근이 없으면 이런 쉼이 기쁘지 않겠지.
요즘 철학책을 읽었더니 내 몸이 점점 더 사그라듦에 두려워진다. 자꾸 하기 싫은 일을 하다가 놓치는 삶을 생각하게 된다. 잘 인정하지 않았지만 명백한 회의를 느낀다. 존 그레이처럼 인간을 회의적으로 그려내는 회색분자의 이론은 내 일상을 탁하게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만큼 무서운 곳처럼 느껴지진 않나 보다. 무섭기는커녕 밥은 굶겠냐는 흐트러진 정신머리가 더 앞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하는 얘기라는 말도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그저 난 현재의 목적보다 미래의 목적을 중요시하는 삶에 염증을 느낄 뿐이다. 어쩌지도 못하고 이래저래 끌려왔지만 쥐어 잡힌 멱살을 풀고 미래라는 놈의 팔목을 꺾고 똑똑히 일러두고 싶다. 미래야 넌 멀리 떨어져 있는 놈이잖아. 근데 미래가 있긴 한 거냐. 그걸 네가 어떻게 보장할 건데. 네가 이순재 아저씨야? LIG 손해보험이야? 그런 허튼 가설을 나보고 믿으라고? 아직도 모르겠냐. 직장인은 미래에 발목 잡힌 노예일 뿐이야. 어디 그뿐이냐. 미래를 추구하기에는 내 젊음이 벌써 축나고 있다고. 예전에는 130까지 들던 벤치가 이제 안 들리기 시작했다고. 왜 이 젊고 싱싱한 몸으로 나이 든 후에 생길 이해관계까지 따져야 하냐고. 내 말이 맞지? 지금 솟아나는 열정을 짓누르고 얻는 낸 미래라는 게 정말 그렇게 추구할 가치가 있어? 꼬부라진 몸뚱이로 근사한 아파트에 있으면 성공적인 삶이야? 그땐 누가 네 말을 들어주는데. 치킨 뜯으면서 영광의 시절에 놓친 가능성을 읊어봤자 그걸 누가 알아주는데. 젊은 애들이 저 꼰대 또 옛날 얘기한다고 혀를 찰 텐데. 알아줄 필요 없다고? 그럼 지금 왜 그러고 있는데? 그게 말이 되는 거냐? 왜 30년 후에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도 모르는 꼬부랑 영감탱이를 위해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숨죽여야 하는데. 왜 내 부족한 잠을 사무실에 바쳐야 하는데. 이런 말을 브런치에 적고 있지만 말뿐이다. 난 내일도 늘 진저리 치는 알람 소리를 듣고 무거운 몸뚱이를 끌고 가서 퇴근 시간만 기다리다가 퇴근할 예정이다.
사이렌이 울리지는 않는 사이렌 오더로 오늘의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스타벅스 로고가 세이렌이었구나. 그러고 또 보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인어공주였다. 어릴 적부터 붉은 머리에 붉은 입술을 한 반인 반어가 좋았다. 우연히도 한때 푹 빠졌던 <말괄량이 삐삐>, <빨강머리 앤>도 다 빨갛지 않나. 그러니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에서 세이렌은 사람을 유혹해서 침몰하게 했나 보다. 붉은색은 위험한 거니까. 어느 동네나 가면 스타벅스부터 찾고, 그 먼 유럽까지 가서도 스타벅스에 앉아서 수많은 돈을 쏟아낸 나는 그 유혹에 찬성하는 쪽이다. 숨죽이고 사는 내가 누리는 유일한 사치이자, 집이 좁은 내가 누리는 널찍한 사무실이다. 난 가끔 이 공간에서 인간 삶의 드라마를 발견하곤 한다. 군복 뒤에 숨은 내 진정한 자아가 비밀스럽게 자리하여 조용히 쌓여간다. 이런저런 글을 쓴다. 무슨 내용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주위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상상해서 쓰는 것을 좋아한다. 반드시 내 얘기를 써야 한다거나, 진실을 써야 할 의무 따위는 없다. 내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니까. 난 지금 이 글처럼 스타벅스를 배경으로 수많은 일기 형태의 글을 썼다. 여러 번 공들여 고치고 또 고쳐도 설득력이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아무렴 어떤가. 외려 더 자유롭게 뻗어나갔다. 날 불한당으로 만들고 어쩔 때는 먹지도 않는 술꾼으로 둔갑시켰다. 나를 혁신적이고 늘 깨어있는 놈으로 꾸며내고, 불행한 과거를 지닌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도 손쉽게 해냈다. 난 겉으로는 육체노동을 하는 군인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변장한 위대한 작가라는 긍지를 갖고 살았다. 가족과 옛 친구들로부터 단절된 지금, 글쓰기만이 이전과 지금의 삶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 되어주었다.
한참 비비적거렸는데도 여태 열 한시다. 사무실에서라면 지금 다들 좀비 같은 표정으로 회의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공복으로도 입가에 만족감을 머금을 수 있었다. 에어컨을 피해 스타벅스 구석자리에 앉아서 소설책을 펴 읽었다. 장대한 서사가 조금씩 시동을 걸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아가고 있었다. 누명을 쓴 남자와 그를 사랑하는 여인. 둘 사이를 우려하는 부모와 아직 한참 어린 주제에 시기하는 동생. 그렇게 점차 노곤하게 이야기 속으로 휩쓸려 가는데 자꾸만 옆자리 아저씨가 눈에 걸렸다. 이마트 쇼핑백에 서류를 잔뜩 가져와서는 테이블 주위로 몇몇 서류를 흩어놨다. 혼자서 4인 테이블을 다 차지하고는 이것저것 보다가 잠시 일어나서 전화통을 붙잡고 언성을 높였다가, 다시 앉아서 컴퓨터를 붙들고 화면과 씨름하고 있었다. 뭘 작성하는 걸까. 여기가 사무실인 모양이군. 스타벅스를 일종의 작업실로 쓴다는 점에서 그는 나와 동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넓고 쾌적하고 커피도 맛있고 화장실도 청결하니 지금 이 시각에도 스타벅스에는 사람이 가득하겠지. 그러고 보니 여기 이 사람들은 출근하지 않는 신의 자식들 아닌가. 그들의 책상 위에 마치 트로피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누가 보면 입장권인 줄 알겠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아저씨의 얼굴에 눈길이 갔다. 허리를 잔뜩 꾸부리고 앉아서 인상을 잔뜩 쓰고 뭔가를 적는 꼴이 안쓰러웠다. 우리 아버지 연배쯤 되셨을까. 아니 그보다는 젊으신 것 같은데 아마도 나이는 아버지보다 더 많을 거로 생각했다. 그의 삶이 녹록지 않았을 것이라고 섣부른 추측을 했다. 오만하게도 한 번 스캔하고는 저런 모습으로 늙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스쳤다. 단순히 차림새뿐만 아니라 축 처진 몸에서 풍기는 고생의 흔적이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했다. 흰 셔츠의 접힌 곳에는 검은 얼룩이 보였고, 표정에는 조급함과 절박함 그리고 씰룩거리는 낭패감이 보였다. 무슨 일이려나.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흩어진 서류들에 눈이 갔고, 파산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곤혹스러움에 난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며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 어느 순간 자리를 잘못 잡았다는 기분과 함께 나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는 그의 처지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다리를 꼬고 한창 책을 읽는데 아저씨가 의자를 내 테이블로 끌며 다가왔다. "저기 물어볼 게 좀 있는데요." "아, 예 무슨 일이세요." 아저씨가 내민 서류에는 작은 글자들이 있었고, 입금한 돈과 빠져나간 돈이 보였다. 계좌내역인가. 난 머리를 굴려 열심히 해독했다. 업비트라고 씌어있고, 돈이 들어갔다가 쭉쭉 떨어지네. 알만했다. 비트코인 명세였다. "아들놈이 전세보증금을 빼서 한 건데, 이걸 되돌려 받지 못해서 파산 신고를 하려고 해요." "아, 그렇군요. 요즘 이런 일이 많다더니 힘드시겠어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아저씨는 날 빤히 쳐다보더니 자신이 왜 말을 걸었는지 생각을 곱씹는 눈치였다. 난 너무 재촉했나 싶어서 잠자코 다른 서류를 훑어보면서 상황 파악을 했다. 숫자가 단 3일 만에 1할대로 내려앉았다. 탕진이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노트북 화면으로 파산 신청 서류의 질문이 보였다. 그리고 아저씨가 어렵사리 얘기를 꺼냈다. "아들놈이 전세보증금을 빼갔는데, 그걸 찾을 수가 없다는구려. 그래서 아들놈이나 제대로 살라고 회생 절차를 밟으려고 해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아드님 빚이 상당한가요. 그래서 파산 신고하시려는 거예요?" "이대로 가다가는 회생 불가능할 것 같아서 구제를 요청하려고 해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들이 27살이고, 빚이 큰 것도 아닌데 어떻게 파산 신고를 한단 말인가. 전세보증금도 엄연히 재산을 탕진한 것이지 빚더미에 오른 것도 아니고. 난 아저씨에게 큰 빚이 있는지 물었지만, 두 분 다 직장이 없을 뿐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 파산과 달랐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 서류 몇 개를 더 보고 이상한 얘기를 지껄였다. 뭘 도와드려야 할지 생각하다가 왜 파산 신고를 하냐고 따지는 꼴이었다. 아뿔싸 이건 아니다 싶어서 얼른 엉덩이를 뒤로 빼고 다시 물었다.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그는 빼꼼히 노트북을 가리켰다. "변호사가 이걸 써오래." 파산 신고 서류의 하단부였는데, 변호사의 메모가 보였다. 구체적으로 일이 돌아간 상황과 왜 파산 신고를 할 것이며, 어떻게 회생할 것인지 서술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며, 노트북에 뭔가를 막 쓰고 있으니 나라면 이 서류를 작성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런가,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러면 더 자세히 물어서 까짓 거 한 번 작성해볼까. "아드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불러주시면 이걸 작성하기 편할 것 같은데요." "연락이 안 돼. 뭐 게임이나 하러 갔겠지." 화가 나는 말이었다. 요즘 것들이란 쯧쯧. 꼰대 같은 심술이 솟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죄송하게도 파산 당사자도 모르게 아버님께서 이걸 쓰시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더더욱 저는, 더 그렇고요. 변호사라면 이런 거 쓰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뭐라고 하나요." 난 하나 마나 한 말을 또 하면서 다소 냉정하게 서류를 되돌려주고 관심을 끊었다. 주인공이 도버 해협에서 독일군의 공습을 피해 지하실로 숨어드는 문장으로 돌아왔다. 아저씨 역시 파산 신고라는 어둠의 참호 속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몸을 웅크린 꼴이었다. 난 힘이 없는 그를 밀쳐내고 허구의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입맛이 텁텁했다. 샌드위치라도 시켜 먹어야 하나.
아저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노트북을 붙들었다. 터치폰을 마치 버튼식 휴대전화기처럼 번호를 마구 두드리더니 변호사에게 전화를 거는 것 같았다. 호소와 간청의 목소리. 나를 이 참호에서 구해내시오. 그는 전장에서 홀로 외떨어진 소총수처럼 외로워 보였다.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집으로 가서 편히 쉴 수 있을까. 그는 목이 말랐는지 얼음물을 들이켜고 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단단히 붙들고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책장을 넘겼다. 쉼 없이 흐르는 분수대처럼 내 의식이 쏟아졌다. 잔잔한 호수와 같았던 내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물줄기가 예기치 않게 장애를 일으켰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잘 표현하는가가 내 유일한 바람이었다. 그의 바깥에 선 나는 시간이 가는 줄로 모른 채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