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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ug 01. 2019

한강으로 뛰어든 사내

한강으로 뛰어든 사내를 위한 변명


 정장 차림을 한 중년 사내가 한강 다리 위에 선다. 난간을 잡고 위태한 자세로 매달린다. 사내의 친구로 보이는 이가 만류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강물만 응시한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넋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커다랗고 시커먼 게 있어. 영문을 모르는 친구는 뭐가 있냐며 대꾸한다. 수면은 캄캄하기만 한데. 한없이 슬퍼 보였던 사내는 느닷없이 싸늘한 얼굴로 친구를 보며 뇌까린다. 끝까지 둔해 빠진 새끼들. 그는 이어 잘들 있어, 인사를 하곤 강으로 뛰어든다.


 이 장면은 영화 <괴물>의 프롤로그다. 난 종종 강으로 사라진 그를 떠올린다. 아마도 괴물의 간식이 되었겠지. 서울 시내 어느 하수구로 흘러가서 다시 한강으로 돌아왔을지도. 그는 왜 마지막에 그리도 위악을 부렸나. 둔해 빠졌다니 그게 곧 죽을 사람이 할 말인가. 아마 전부터 둔해 빠졌고 지금도 변치 않고 둔한 친구를 향한 조소였겠지만, 그 말은 정확히 내게 날아와 꽂혔다. 내 대책 없는 무딤에 적중했다.

 한강 둔치에 나타난 골뱅이 형상 괴물은 도시를 휩쓴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은 TV로만 괴물을 접한다. 무참한 식인을 기대하며 채널을 돌린다. 빌딩에 여객기가 처박혀도 그랬고, 배가 가라앉아도 다름없었다. 원체 둔해 빠져 어찌할 도리 없는 놈들 아니랄까 봐.

 귀한 딸이 괴물에 잡혀간 줄도 모르고, 아니 알 마음도 없겠지,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둔한 척 두리번거리며 귀를 파는 꼴이 한심하다. 이쯤 되면 과연 적이 괴물인지 TV 앞에 나사 빠진 표정으로 앉아있는 놈들인지 헷갈린다. 개인주의라는 그럴싸한 표피를 둘러쓴 이 도시는 무관심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알 수 있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모른 척할 수 있다면 그뿐이다. 버스를 타면 죄다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도시는 유기적인 무관심이 미덕인 사회다. 한강으로 뛰어든 사내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였던 건 다 이유가 있었어. 홀로 망각으로 뛰어드는 속이 어지간히 시원했던 모양이야.


게으른 나, 스치는 그들


 요즘 줄곧 무뎌짐에 불안을 느낀다. 놀라지 않고 슬퍼하거나 절실하지 않다. 매사 늘 18도를 유지하며 산다. 세심함과 섬세한 이라는 단어를 적고 싶지만, 무신경함과 냉소함이 비죽 나온다. 계획은 늘 어그러지고, 한시바삐 수습하다 지쳐 침대에 눕는다. 누군가의 환부를 외면하고, 날 의식하며 건네는 말에 의례로 대한다. 살펴 마땅한 얼굴에 고개를 돌리고 모니터만 응시한다. 돌아 누운 잠자리가 편치 않다.


 동료와 바삐 어울리다 퇴근하면 공허가 밀려온다. 그럴 때마다 토핑 올린 커피를 시키고 카페 천장만 본다. 고작 그뿐이지만 이게 나지 싶어 좋다.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내놓고 숨통을 틘다. 난 작가가 그린 섬세함을 맛본다. 꾸역꾸역 읽어낸다. 내 섬세 게이지가 바닥을 치니 뭐라도 먹어야 살만하다.

 더운데 땀도 많아서 이 여름이 쉽지 않다. 어제 통화한 엄마는 대체 언제 집에 올 거냐며 통박했다. 잘 모르겠어요. 생각하기 바빠다는 말을 더워서 통 시간이 안 난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녀는 내 무심함에 긴 숨을 내쉰다. 고작 헬스장에 홀로 들어선 후에야 한숨 돌릴 수 있다. 조금 빈정대는, 약간 무신경한 평상시의 자기 모습을 유지하며 속으로 되뇐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난 꽤 예민한 촉을 지녔는데 말이야.

 카페에서 시원한 에어컨을 쐬며 당의정을 입에 굴리니 좀 살 것 같다. 최근 독서 모임에 다닌다. 주말 아침, 거기 앉아서 낯선 이와 대화를 나누면 왠지 모르게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안심이다. 딱히 대단한 바람이 있는 건 아니고, 낯선 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기분이 좋다. 그는 엄연히 타인이라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될 정도만 다가온다. 부담 없는 관계를 돈을 주고 사서 찧고 까분다. 쉼 없이 현학적인 말을 꾸미다 모임이 끝나면 잊어버린다. 무책임한 연대라고 의심하지만, 어느새 마음을 고쳐먹고 관계가 주는 긴장을 만끽한다. 고작 젖과 좆과 질에 목매던 스무 해는 지나갔고, 내 삶은 시답잖은 격류 위로 딸려가는 세숫대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낱 유머를 잃지 않기 위해 뭔가를 꾸민다. 손발 따위를 이리저리 내두르며 내 둔해 빠짐을 떨쳐낸다.

 집에 들어가기 전 동네를 소요한다. 오늘자 칼로리에 경악해 소모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그렇게 거닐다 더위를 피해 벤치에 앉은 무수한 이를 구경한다. 날 곤두서게 만드는 다정함이 지척이다. 나도 괜스레 마음이 느물 느물해지지만, 내일 아침이면 다시 허덕일 걸 안다. 어쩌면 난 다음날 아침이 되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으리라.


누구나 아는 비밀


 이 영화는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의 작품이다.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즈 분)는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다. 스페인 카스티야 시골 마을이 그녀가 자란 곳이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옛 연인 파코(하비에르 바르뎀 분)와 재회한다. 라우라가 현 남편과 결혼하기 직전에 만났던 남자다. 달뜬 만남의 어색함도 잠시, 스페인 시골 마을 특유의 왁자지껄한 축제 분위기에 취해 두 사람은 웃고 떠든다. 교묘하게 흐르는 감정을 외면한 채 술을 들이켜고 춤을 춘다. 하지만 라우라의 딸이 괴한에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지며 상황은 급변한다.

 그놈의 과거, 과거, 과거다. 과거엔 치정이 있고, 음모가 있으며 전복과 뒤틀림이 있다. <누구나 아는 비밀>은 흔한 납치극처럼 보이지만, 정작 속내를 들추면 온갖 사연이 뒤얽힌 관계도를 그릴 수 있다. 거기에 윤리와 계급이라는 가치가 개입되자 상황은 더 꼬여버린다. 마치 과거를 복기하지 않고는 그 어떤 진실도 알아낼 수 없다는 식이다.


 이 관계도에서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파코다. 그는 라우라의 딸을 찾겠다고 거품을 문다. 아버지라는 작자는 나타나지도 않는데, 그는 현상금을 위해 제 땅까지 팔겠다며 설친다. 대체 저 양반은 왜 오버를 할까 궁금하던 차에 영화는 기다렸다는 듯 누구나 알았지만 나는 몰랐던(어쩌면 예측했던) 비밀을 발설한다.

 그래, 여기에도 흔치 않게 둔해 빠진 남자가 있었어. 마을 사람은 다 아는 출생의 비밀을 정작 당사자인 본인은 몰랐다니. 네가 아침 드라마 주인공도 아니고. 과거 파코는 라우라의 열망을 읽지 못해 그녀를 놓쳤다. 다 버리고 떠나야 마땅할 때 큰 땅을 사서 그녀를 내빼게 했다. 그렇게 그녀를 놓치고 가혹한 시간을 보내다 농장을 사서 밭을 갈았다. 황무지를 대농장으로 만들고, 근사한 포도주도 내다 팔았다. 마을에서 신망을 얻고 등을 어루만져 주는 여인과 새 삶을 꾸렸다. 근데 이 남자는 뭐가 그렇게 거슬렸는지 제 삶을 망치려 드는가. 눈을 부릅뜨고 노골적으로 가스라이팅 하려고 드는 라우라에 또 속아 넘어간다. 과거의 연인이 오열하자 이성을 잃고 저를 무너뜨린다.

 자기를 배신하고 아르헨티나로 내뺀 라우라의 딸이 정말 그의 딸일까. 사실 그건 영화에서 중요치 않다. 영화가 묻고 싶었던 건 그의 무릅씀을 부른 죄의식이다. 제 무딘 감각이 놓친 과거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회귀본능이다. 파코는 자신을 등쳐 먹으려는 가까운 무뢰한을 눈치 못 채 낭패를 본다. 지나간 여자를 잡지도 못하고, 속죄할 대상도 찾지 못한 채 커다랗고 시커먼 제 침대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있다. 그의 오지랖과 주제넘음이 그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다.


 어떤 관계는 좋아지지 않고 해소되지도 않는다. 포기해버려야 마땅한 사이도 있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바람이야말로 다 허상일 수 있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자신의 첫 작품부터 <누구나 아는 비밀까지>까지 공간만 달라졌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온갖 아이러니의 연쇄로 지탱되는 공동체. 서로 위하는 척하지만, 속내를 까놓고 보면 대체로 각을 세운 이해관계의 미로. 그건 그 자체로 근심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도심과 어울리지 않는 스페인의 작은 마을 사람들이 구성한 관계도에 난 숨이 막혔다. 내 눈에 웃고 떠드는 그들의 표정은 가식을 머금고 있다. 밀푀유처럼 겹겹이 쌓인 사연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들은 매사 마을 공동체에 기대지만, 실상은 무참하다. 결말은 비밀이다. 그저 누구나 한 마디씩은 거들 수 있는 당위가 있었지만, 그걸 돌볼 여력이 서로에게 없다는 게 공동체가 내린 귀결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고해 보였던 가족엔 균열이 생기고, 과오는 쉽게 판단할 수 없으며, 의심의 추는 쉽게 상대를 백안시한다. 영화는 막을 내리고 더 큰 고민이 시작될 것임을 암시한다.


 내가 아는 녀석이 있다. 소심하고 천진하며 어딘가 매사 좀 심드렁한, 두부처럼 희멀건 미소를 한 녀석. 내게 큰 상처를 남기고, 나도 지기 싫어서 말로 찔러버린 사람. 회한은 뒤늦게 찾아와 멍청한 얼굴로 감상에 빠지게 한다. 회한, remorse란 말의 어원은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를 뜻한다. 난 내가 뱉었던 말을 어디선가 다시 깨물고 있을 녀석을 떠올렸다. 깨문 혀가 얼얼하다. 내 둔함은 고칠 수 없고 여전히 누군가를 내칠 것이다. 무심한 말, 매정한 손짓으로 지껄일 것이다. 한 늙은 남자의 말처럼 바윗돌이나 모래알이나 가라앉기는 매한가지다. 찰나가 미세한 균열을 내고, 뭔가 일어나도 난 알 수 없다. 그저 내 둔함을 잊으려 흘려보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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