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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29. 2019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

책 <유혹의 기술>, 로버트 그린 저

 1956년 런던 히스로 공항에 마릴린 먼로가 도착한다. 일순 번갯불 같은 섬광이 지나가고 흰 드레스를 입은 세기의 섹스 심벌은 손을 흔들며 유유히 공항을 빠져나간다. 먼로가 영국에 이른 이유는 당대의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출하는 <왕자와 무희>에 캐스팅되었기 때문이다. 벅찬 기대를 품고 촬영장에 도착한 먼로는 밤잠을 설쳐가며 촬영에 임한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먼로는 올리비에와 사사건건 부딪친다. 기술적인 영국식 연기론을 가진 올리비에는 메소드 연기를 한다며 까탈스럽게 구는 먼로를 고까워한다. 원체 섬세하고 여린 성격을 가진 먼로는 촬영장의 숨 막히는 분위기에 못 이겨 빈번히 스케줄을 어긴다. 그때마다 갈등을 수습하러 조감독이자 올리비에의 비서인 콜린이 투입되지만, 오히려 먼로와 사랑에 빠져 밀회를 즐긴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먼로와 눈부신 영국 해변을 거닌다.

 이 일화는 영국 작가인 ‘콜린 클락’의 자서전(My Week With Marilyn)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콜린은 스무 살 중반 영화 스태프로 일하던 시절을 술회하며 먼로와 보낸 일주일을 꺼내놓는다. 콜린은 먼로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자 모든 걸 버리고 그녀에게 뛰어든다. 당시 사귀던 약혼녀도 모른 척하고 영화 조감독까지 사임한다. 심지어 먼로를 따라 미국에 가겠다며 부모 맘에 대못을 박는다. 당시 먼로는 극작가 아서 밀러와의 세 번째 결혼마저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다. 배우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압박감과 밤마다 찾아오는 외로움에 신음했다. 그녀로서는 낯선 타국에서 일주일 정도 자신을 위로해 줄 다정한 남자가 필요했으리라. 어깻죽지를 내주고 다정한 말을 건네 줄 단기 애인으로 콜린을 낙점한 셈이다. 콜린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무차별적 유혹에 저항하지 못했다. 콜린은 자서전에 당당한 어조로 적는다. 먼로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라면 뭐든 다 했을 거라고. 환갑이 다 된 지금도 먼로와 보낸 일주일이 인생에 남긴 자국은 선명하다며. 이 흥미로운 일화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져 잠든 망자를 스크린에 다시 소환했다. 


 먼로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학교에서도 늘 외톨이였다. 불우한 가정과 양부모의 폭력은 그녀를 옥좼다. 그녀의 인생이 바뀐 건 열세 살 무렵 꼭 끼는 스웨터를 입고 나서부터였다. 하루아침에 남자들의 관심이 쏠리자 인생은 굴곡진 비탈로 휩쓸려갔다. 먼로가 동네를 지나가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시선을 그녀에게 쏟았다. 집을 떠나 성공하고 싶었던 먼로는 할리우드에서 배우가 되기로 한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 깨닫고 이를 십분 이용해 성공 가도에 진입한다. 그건 유혹의 기술 따위가 아니다. 존재가 온 세포를 깨우는 위력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캐멀롯(Camelot)엔 이런 대목이 있다. "잊지 마세요. 한때 그곳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한순간의 청명한 빛이 비칠 때. 캐멀롯이란 곳이 있었답니다." 유혹이란 마치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캐멀롯처럼 한 순간을 사로잡는 청명한 빛과 같다. 

 금발의 섹시 가수로 분한 <뜨거운 것이 좋아>(1959)에서 먼로가 엉덩이를 흔들며 기차역에서 짜릿한 포즈를 취할 때를 떠올려보라. 그녀는 평생 단 한 번의 섹스신 없이도 대중을 잠식했다. 얼마 전엔 십 대 시절 그녀가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되어 고가에 거래되기도 했다. 놀랍게도 그녀를 영화에서 한번 본 적 없는 요즘 녀석들이 그녀에 목맨다. 그녀를 언급하고 팔로우하고 해시태그를 단다. 그녀를 다시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띄우고 침대를 달군다. 

 마릴린 먼로는 성적 이미지가 죽음을 잠식한 가장 극적인 경우다. 금발 머리에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입가의 점은 반쯤 감은 눈이 열리면 더 도드라진다. 붉은 입술은 백색으로 재단된 옷과 절묘하게 어울리고, 일부러 한쪽을 깎아 만든 하이힐이 그녀의 굴곡진 몸매를 더 부각한다. 로버트 그린의 <유혹의 기술>을 읽어보면 마릴린 먼로처럼 성적 매력을 바탕으로 이성을 유혹하는 ‘유형’을 ‘세이렌’이라고 이름 붙인다. 남성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지배하는 방법이다. 저자는 세이렌 외에도 9가지 유형을 제시하며 유혹의 사례를 흥미롭게 펼친다. 두 번째 챕터부터는 클레오파트라, 돈 후안, 카사노바, 바이런까지 세계사에 숨은 초절정 고수들이 보유했던 솜씨를 체득한다. 난 실전에 써먹을 수 있길 고대하며 눈에 불을 켜고 온갖 기술에 밑줄을 쳤다. 

 유혹이라는 단어엔 부정적 뉘앙스가 있다. 정신을 혼미하게 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나쁜 길로 빠지게 한다. 나 역시 극도로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위험 신호를 느낀다. 본능적인 위기감에 우선 피하고 본다. 내게 유혹이란 그런 무차별적인 속성이다. 일종의 습격처럼 훅하고 들어오는 식이다. 습득하고 숙달할 수 있다는 기술론으로는 정의가 불가능하다. 난 로버트 그린이 역사의 뒤안길에 새겨진 무수한 유혹자를 언급할 때, 어쩌면 유혹이란 온 심장을 뒤덮는 예술의 작동법과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했다. 육체와 음성 그리고 고유한 제스처가 당시의 분위기와 만날 때 고유한 순간을 선사한다. 그걸 아무리 언어로 재단해봤자 무력함만 앞설 뿐이다. 예술이 날 사로잡는 순간 붓을 쥔 화가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이치다. 당대의 바람둥이가 훌륭한 예술가이기도 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먼로 역시 섹스 심벌이라는 이미지에 가려 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필모그래피를 가진 위대한 배우였다.


 먼로가 세상을 뜬 지 5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대중은 마릴린 먼로를 회자하고 인용한다.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는 책과 영화, SNS 게시글이 마릴린 먼로를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사각형의 틀 안에서 고혹적인 모습으로 박제된 유혹의 본령이기 때문은 아닐까. 내 맥북 바탕화면에 먼로를 새겨 넣었다. 생에 단 한 번도 진정한 행복을 맛보지 못했다고 울먹이던 그녀를 뒤로하고 새하얀 미소를 몇 번의 클릭으로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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