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Mar 08. 2019

‘좋은’ 사람과 좋은 ‘이야기’

본 글은 부산외대 신문 482호에 <박민진 작가의 스핀오프(spin-off)>라는 코너명으로 연재한 글입니다.

평소 밝고 긍정하는 사람을 미심쩍어한다. 별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긍정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휩싸인 사회에 반감을 갖는다. 철학자 ‘한병철’의 말처럼 20세기가 무엇을 하면 안 된다고 손사래 치는 금지의 시대였다면, 요즘은 뭐든 해야 한다고 스스로 옥죄는 자기 착취의 도시를 살고 있다. 긍정은 그 자체로 좋지만 의심하고 회의하는 자를 배척하는 분위기는 우려스럽다. 미소를 머금고 진취적인 자세로 뭐든 척척 해내는 사람만이 인정받는다면, 염세와 냉소의 가치는 소멸할 것이다. 회의하고 의심하길 주저 않는 난 긍정의 사회에서 눈치나 보다 꽁무니를 뺀다.


책과 영화를 볼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계몽적인 영화를 볼 때 마음은 개운하다. 온갖 인간사의 갈등을 깨달음이라는 깔때기로 오므리니까. 미처 돌아볼 새 없이 모두가 납득할만한 결론을 향해 주저 없이 치닫는다. 이런 작품에선 눈앞의 난관이란 그저 극적인 반전을 위한 도약대일 뿐이다. 진실, 정의, 소통과 같이 듣기만 해도 굽은 등이 펴지는 가치를 숭배한다. 쉬운 깨달음과 반성엔 망설임이 없다. 하지만 이런 단선적 메시지는 입체감을 결여한다. 마치 자기계발서를 읽듯 현실의 척박함을 외면한 채 능청을 떠는 꼴이니까. 어쩌면 좋은 이야기란 ‘세상은 네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태도에 있을 것이다. 역사의 터널을 통과해 살아남은 고전 문학이 그리도 어려운 이유도 역시, 열띤 긍정의 유혹을 이겨낸 사색의 결과일 테니까. 영화 <증인>은 밝고 따듯한 영화다. 한때 민변 출신이었던 변호사 순호는 현재 대형 로펌에서 일하고 있다. 한 사건을 맡으면서 범행 목격자인 자폐증 소녀 지우와 만난다. 지우는 살인사건을 목격하고 용의자를 지목하는데, 순호는 그녀를 통해 사건의 실마리에 접근한다. 영화는 세월의 풍파에 쫓기다 끝내 갈피를 잃은 성인, 학생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장애인 소녀라는 소재로, 이 도시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두 사람이 세상과 화해하는 광경에 햇살을 비춘다. 성실한 연기를 펼친 배우들이 믿음직스럽고, 군더더기 없는 각본도 무난하다. 무엇보다 혹여나 내쳐진 사람이 없나 꼼꼼하게 살피는 따듯한 마음이 있다. 관객에 어느 짐 하나 맡기지 않으려고 신경 쓴 연출이 가진 힘이다. 이렇게 잘 차려진 밥상을 받고 나면 ‘웰메이드’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난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전형성’이라는 낱말엔 게으름이라는 숨은 속뜻이 있다. 모두가 기대하는 귀결을 맞는 영화에서 복잡한 상념에 젖을 기회란 없다. 좋은 영화를 봤다고 스스로 다독여도 끝내 기억에 둥지를 틀긴 어렵다. 프랑스어인 ‘캠프(Camp)’란 기교를 통해 비자연적이거나 조악한 피사체를 즐기는 예술 사조다. 과장된 방식으로 자세를 취하는 연극배우를 떠올려보라. 예술작품을 볼 때도 ‘캠프적인’ 뭔가를 의식할 때가 있다. 또렷하게 드러난 주제와 세상은 나아지고 있다는 식의 낙천성. 마치 앤디 워홀의 작품처럼 네온사인이라도 달린 듯 빛을 내뿜는 삶의 환희. 영화 <증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마치 돋을새김을 품은 듯 유난히 착하다. 착한 일을 한 소녀는 행복을 쟁취하고, 뭔가를 깨달은 변호사는 뉘우치고 나아간다. 세상을 가지런히 정돈하려는 플롯엔 아무리 봐도 음습한 구석 하나 없다. 긍정을 강요하는 사회처럼 과장된 깨우침에 하품이 난다.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일지 모르지만, 착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가 되긴 어렵다.

이전 19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