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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0. 2019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라스트 미션

뉴스엔 연일 광화문 광장의 노인들이 비친다. 카메라가 국기를 흔드는 그들의 격렬함을 훑는다.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선 노인 얘기만 나오면 살벌해진다. 광장 가득 모인 그들을 마치 누군가가 사주한 세력으로 치부하는 말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꼰대. 난 의구심을 느낀다. 왜 누구도 그들의 입장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걸까.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엔 왜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OECD 국가 중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최고 수준이다. 살기가 팍팍해진 이들이 상식과 먼 얘기를 할 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박탈과 고립, 펜스 밖으로 내몰린 처지에 대해 논의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요즘엔 그들을 '없음'으로 치부하고 도외시한다. 그건 예술작품도 마찬가지다. 왜 한국 소설과 영화에선 노인 문제를 다루지 않을까. 젠더와 페미니즘, 빈부격차의 논의는 활발한 데 비해 노인은 찬밥 신세다. 존재가 부정당한 노인들이 어쩔 수 광장에 내몰린 건 아닐까.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큰 문제가 청년 고용 문제라면, 그 못지않은 화두가 노인 혐오임을 모른척해서는 안 된다. 두 세대의 문제를 대결 구도로 몰고 가는 의심스러운 말들이 횡횡한다. 한낱 꼰대 탓으로 본질을 흐려선 곤란하다.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는 갈등만 부추길뿐이다.


영화 <라스트 미션>(The Mule, '19.3.14. 개봉)은 올해 한국 나이로 90세가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화훼업자 ‘얼’로 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육체는 죽은 나무처럼 시들어 버렸다. 70년대 스파게티 웨스턴의 기수로 황야를 주름잡고, 80년대의 '더티 해리' 시리즈에서 도심을 휘젓던 시절의 흔적은 사라졌다. 얼은 왕년에 크게 사업을 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지만, 지금은 빈털터리에 가족에겐 외면받는 신세다. 오 갈 곳 없는 처지에 몰린 그는 멕시코 카르텔 마약 운반책을 맡으며 위기에 빠진다. 처음엔 운전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얼떨결에 시작했지만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FBI가 수사망을 좁혀오고 조직은 그에게 더 깊숙한 가담을 요구하며 수렁에 빠지지만 운전대를 놓지 못한다. 얼는 실패로 점철된 인생을 돈으로 조금이나마 복구하고 싶었다. 얼은 손녀 결혼식에 술을 돌리고, 불타버린 참전용사 회관 재건 비용을 내며 압류당한 농가를 되찾는다. 아내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실패한다. 얼은 끝내 처절하게 실패한다. 돈으로 시간은 살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낡은 포드 트럭으로 미 전역을 오가는 이 영화는 줄곧 찡그린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비춘다. 실패자의 주름진 얼굴, 그건 그 자체로 스펙터클이다. 별다른 말이 필요 없는 퇴장의 언사다. 얼은 뜬금없이 식사하다 말고 읊조린다. 젊을 때일수록 일보단 가족을 챙기고, 빌어먹을 핸드폰 좀 그만하라며. 옆자리의 젊은 형사에게 한 말이었지만, 결국 이 말은 항복 선언이다. 감독으로서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선배로서, 그의 토로엔 유언처럼 들리는 바가 있어 마음이 사무친다.


난 <라스트 미션>를 어른의 영화라 생각한다. 인생을 앞서간 자가 처절한 실패를 통해 내뱉는 참회다. 젊은 사자가 이빨 빠진 사자를 쫓아낸다. 전장을 누비던 백전노장도 사라진다. 그럴수록 노인의 목소리는 잦아든다. 중국 송나라 유부(刘斧)의 <청쇄고의>(青琐高议)엔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라는 말이 있다. 풀이하면 신구세대의 교체, 그들의 부단한 발전과 전진을 의미한다. 무수한 흐름 속 도시는 노인을 돌아보지 않는다. 영화는 얼을 필요로 하는 유일한 이들이 사회의 빈곤층, 그중에서도 미국에서 골칫덩이인 멕시코 마약밀매조직이라는 점을 상기한다. 그들이 왜 범죄에 내몰리는지, 미국 사회에서 노인의 가치가 어떻게 소멸하는지 알 수 있다. 얼은 평생 꽃을 피우기 위해 인생을 바쳤지만, 돌아온 건 인터넷 시절이 만든 소외감뿐이다. 정작 그를 챙겨주고 유대를 가지는 건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유색인종밖에 없다.


한국에서는 성공한 이의 말엔 귀를 기울이지만, 낙오한 자의 충고는 넋두리로 치부한다. 그건 노인에게도 마찬가지라 관용의 시선은 오갈  없이 증발한다. 그럴수록  영화의 가치를 생각한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금쪽같은 주말에   극장을 찾을까. 마냥 즐겁고 싶은 걸까. 스트레스 타파에 제격인가.  종종 영화가 매일 반복되는 일과에 갇힌 우리의 삶을 확장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거리가  시공간에서 고뇌하는 타인의 삶에 들어간다. 비록 완전한 이해엔 가닿지 못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을 상상하며  나은 인간이 되길 염원한다. 영화는 성공의 가치만 쫓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오히려 실패한 자의 쓸쓸한 뒷모습을 응시하는 회한이다. 마블 시리즈가  극장을 점령한  시점에 <라스트 미션> 주목을 받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숭고한 죽음을 생각하는 영화가 있다. 노인이 조롱의 대상이   도시에서 위엄 있게 늙는다는  뭘까. 나뭇잎은 흔들리고 물결은 출렁이고. 어떻게든 삶은 계속 이어진다.


(영화사로부터 소정의 지원금을 제공받았으며, 주관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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