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을 잘 그리는 게 중요해 보인다.

#16 하루키의 허튼짓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다

by 박민진

난 행복한 사람은 문학과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수월해서 별 고민 없는 상태에 가깝다. 하지만 행복감이 충만하면 나라는 존재가 미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모든 게 노래처럼 흘러가 버린다. 문학은 아픔을 자세하게 적는 행위라는 점에서 행복과 거리를 둔다. 불행이란 행복의 반대말이 아니라 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쾌락의 총체인 행복은 단순하고 일시적이다. 그 반면에 불행은 자꾸 허공을 보며 곱씹게 된다.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그건 신에게 버림받은 중생의 마음과 다를 게 없다. 그럴 땐 뭔가를 읽고 적어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문학은 내 불행의 이유를 찾아내는 샛길 정도로 기능한다.

불자는 행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는 꼴이다. 불행이라는 낱말은 행복을 기본값으로 산정하고 '불'자를 궁색하게 만든다. 행복이 기본이라고 생각하니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천지를 시끄럽게 한다. 특히 그 빌어먹을 인스타그램. 온갖 휘황한 행복이 내 처진 불행을 갈곳 없이 내몬다. 하지만 내 친구들 중에는 인스타가 진짜 자기 모습이라고 말하는 애들도 있다. 난 그건 허울 좋은 포장지에 불과하다고, 그건 진짜 너랑은 무관한 창작의 산물이라고 비난했다. 덧붙여서 부캐니 뭐니 역겨운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그러면 녀석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기를, 그 피조물마저도 내 속에서 낳은 애니까 내가 키운다고 당당히 말했다. 그러니까 현실의 나는 빈궁하고 초라한데, 인스타 계정으로 만든 나는 행복하고, 그 행복을 진실로 믿어버린다니 내게는 먼 얘기처럼 들렸다. 소외된 나는 그럴 때마다 초라해져선 책을 펴고 불행이 판을 치는 이야기를 읽는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책을 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내 불행과 소설 속 누군가의 불행을 맞대고 요리조리 비교해본다. 나만 이 꼴로 사는 건 아니라는 상대적인 위안을 느낀다. 내 불행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같이 죽는 것도 도움이 되니까. 내가 사랑하는 소설들도 거의 다 불행에 시달리는 플롯을 가진다. 일류 소설가의 이야기엔 고유한 어둠이 드리우고, 쓰라린 통증에 시달리는 허구의 인물들이 손을 저으며 밖을 나선다. 가끔 소설을 읽고 남는 게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나는 소설을 불행 경연대회라고 말해주곤 한다. '경연대회에 남는 게 어딨어.' 경연대회는 그냥 뽐내는 거다. 각자 나름대로 봐줄 만한 고통을 전시하고 의기양양 득의만만한 거지.


소설 속 주인공이 느끼는 불행이 낯에 익은 건 아마도 내가 느낀 가치 있는 시간이 대체로 불행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면서 겪었던 꽤 많은 불운이 내 대뇌피질에 묻어있다. 흠집 난 곳은 살로 메워져도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반면 아름답고 행복했던 기억은 아스라해져 전두엽을 스치고 대부분 휘발됐다. 난 내 속상함에 비견할만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작가가 공들여 만든 고통을 변태처럼 즐기면서 아무도 몰라주는 내 고통을 잊는다.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이랄까. 그래서 사람은 불행하면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른다. 남들이 내 얘기를 안 들어주니까. 내 고통이 진짜 끝내주게 아픈 비극인데,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베스트셀런데. 다들 내 마음을 몰라주네. 떠나간 너도 모르고 곁에 앉은 너도 마찬가지야. 술 한잔 하자니까 도망치듯 퇴근하는 너도 다 사라져.

난 조용한 방에서 내 불행을 뽐내려고 열심히 적는다. 브런치에 올리면 누구라도 읽어주니까. 그때 전화가 울린다. 어머니의 하소연. 아버지는 지치지도 않는지 여전히 속을 썩인다. 평소에 연락도 안 한 죄 많은 아들은 어쩔 줄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다. 전화를 끊고 한숨이 나왔다. 내 누추한 얼굴은 그녀를 돌볼 여력이 없다. 어머니의 불행은 누가 알아주나. 마음이 심란해져서 뭐라도 읽으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질 않는다. 이럴 때 야구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스토브리그가 한창인 프로야구는 곧 따듯해지면 시범경기를 시작할 것이다. 올해는 한화가 가을에도 야구를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한화는 매년 꼴찌 싸움을 하면서도 겨울엔 올해 수고했다며, 내년엔 더 나을 거라고 저희끼리 위로한다. 사실 서로 못 미더우면서도 덕담 차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이제는 속지 않는다. 어림도 없지. 한화 이글스는 늘 장렬하게 패배하면서도 여전히 제 나름대로 들어줄 만한 이야기를 써가고 있다. 오죽하면 불꽃 한화 아니던가. 십 년 가까이 하위권에 맴돌던 한화 야구는 패배의 아이콘이 되었다. 날이 선선해지고 프로야구가 시작되면 그들은 계속 지는 싸움을 할 것이다. 주황색 유니폼을 입고 지치지도 않고 패배하겠지. 늘 져도 경기는 하니까 괜찮아. 나 역시 지치지 않고 라디오로 중계방송을 듣는다. 한화가 야구를 한다는 게 그 자체로 기적처럼 여겨진다. 이기지도 못하는 팀이 존속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이 여전히 살만한 이유처럼 느껴진다. 결국엔 어떻게 지느냐의 문제다. 한화는 모든 팬이 납득할 수 있게 용을 쓰다가 고유한 방식으로 진다. 비극은 그 나름의 유쾌한 포물선을 그린다.

날이 좋을 때면 구장 외야석에서 앉아 경기를 즐긴다. 난 투수의 뒤에서 공을 던지는 제스처를 바라본다. 그 유려한 몸짓을 따라나선다. 몸을 비트는 게 꼭 춤 같다. 목덜미에 굵은 힘줄을 세우곤 피가 꿈틀거린다. 그런 움직임은 일종의 낙관이다. 팽팽한 일상에도 효율과 발전의 기치를 벗어난 무용함이 팔딱거린다. 근심 없는 무의미의 축제랄까. 세상 무용지물은 가볍다. 난 텅 빈 외야석에서 몸을 기대고 느슨한 움직임들을 즐긴다. 그건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강철 같은 문장보다는 느슨한 문장에 더 마음이 간다. 글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 뭔가를 자꾸 가르치려고 들면 따분해진다. 난 글이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난 밑줄 친 헤드라인보다는 은은한 내색에 더 마음이 간다. 적어도 내 글은 할 거 없는 시간에 쓸데없이 히죽거리면서 읽을 수 있는 글이면 좋겠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세상이 내뿜는 의미심장함을 비웃는 허송세월이 깃들기를 바란다. 마치 한화 야구처럼.


대문호 조지 오웰은 왜 글을 쓰냐는 자문에 정치적이 되기 위해서라고 적었다. 오죽하면 거짓이 지배하는 시대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혁명적 행위이다, 라는 말을 남겼을까. 물론 그는 뽐내고 싶은 이기심이나 미학적인 욕구, 역사에 이름을 새기려는 충동 같은 것들도 있지만 가장 최우선으로 정치적인 올바름을 따진다고 한다. 언론인 출신답게 대답도 되게 무게를 잡는다. 이건 일종의 선언으로, 세상 모든 책상물림을 향한 경고다. 조지 오웰은 온갖 곳에서 벌어지는 근심을 해결하려는 선의를 가진 작가다. 그건 시대적인 영향도 있겠으나, 사변적인 글을 경계하는 태도로 볼 수 있다. 모두가 눈을 돌리고 싶어 하는 음습한 문제를 끄집어내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태도는 조지 오웰의 글이 가진 힘이다. 겉이 번지르르한 이 도시에도 숨죽인 이들이 있다는 걸 늘 살피는 영웅적인 태도다.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결기에 문장은 강철같이 딴딴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의도와 목적이 없는 글쓰기는 비겁하고 무용한 짓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궁색해진다. 이거 좀 찔리네. 작가의 미덕이란 공적인 도량일까.

조지 오웰과 맞은편에 선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루키의 글은 대놓고 쓸데없다. 하루키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히는 건 거의 다 쓸데없는 소리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무책임하게도 쓸모없는 이야기를 잔뜩 써놓고는 수백만 권을 팔아 낸다. 난 그의 소설을 다 읽었다. 그 많은 걸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다 찾아봤다. 하루키의 매력은 딴청을 부리면서 허풍을 떠는 문장에 있다. 통속을 비껴간 유머와 개인의 내적인 고독을 신화화하는 태도가 딱 내 스타일이다. 하루키의 신작 <일인칭 단수>를 읽으면 호크니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 화창한 날씨에 헐렁한 팬티를 입고 수영을 하는 할아버지.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 작은 미술관을 에워싼다. 거기엔 어떤 구김살도 없다. 수영복의 고무줄을 튕기며 콧노래를 부르고 싶어 진다. 스토리도 애매하고 뭐가 하나 빠진 것처럼 엉성하기까지 하다. 마치 도넛처럼 텅 빈 동공을 가진 이야기랄까. 여기서 핵심은 설탕이 잔뜩 묻은 도넛이 아니라 그 텅 비어있는 원형의 공간이다. 그건 불가해한 인생의 어떤 측면이고, 각자가 나름대로 의미를 붙여낼 수 있는 해석의 여지다. 그 구멍으로 여러 것들이 흘러간다. 외로움과 허무함, 연민과 자책, 후회와 회안, 분노와 자책. 작은 구멍인데 참 많은 감정이 오간다. 말하는 것보다 의도적으로 짚고 넘어가지 않은 것에 놓쳐버린 삶의 또 다른 측면이 새어나간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 그저 무의미한 제스처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막상 침대에 몸을 뉘면 자꾸만 그 구멍을 생각하게 되는 거다. 그러고 보니 이게 인스타그램이랑 다를게 뭔가 싶네.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그렇다고 미욱한 보탬도 없는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난 자기 연민을 팔며 무엇을 얻고자 하나. 한낱 불행을 전시하곤 우쭐해하는 건가. 내 글은 정체불명의 위성처럼 궤도를 빙빙 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숨기고 에두른다. 사소한 문제를 상세히 서술하면 사실 부끄러워지는 게 사실이다.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엄살을 떨어.' 인정 투쟁에 목마른 나는 스스로 만든 폐곡선 안에서 빙빙 돈다. '어제 쓴 글과 오늘 쓴 글이 다를 게 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쓰는 것이 쓰지 않지 않는 것보다 나은 건, 내 불행이 당신의 불행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구멍을 잘 그리는 게 중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