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필코 쓰겠다고 다짐했다

#15 꾸준한 글쓰기로 삶을 단단하게 부여잡는 기분

by 박민진

거리로 나서며 오늘은 기필코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졸려서 미칠 것 같았지만 의욕은 충만했다. 퇴근하면 뭔가 적을 기운 정돈 남아있겠지. 하지만 막상 집에 도착하니 택배 상자가 놓여있었고, 권여선의 신작은 자비 없는 기세로 날 끌어당겼다. 나는 마치 묵은 빚 추심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처럼 급히 집을 나섰다. 동네 카페에 가서 맥북은 펼 생각도 없이 다리를 꼰 채 이야기에 빠졌다. 어릴 땐 시험 기간만 되면 책상 서랍 정리가 그렇게 재밌더니, 요새는 마감 시간만 닥치면 매끈한 단편 소설이 날 사로잡는다. 어제도 쓴 게 없으니 오늘은 꼭 써야 해, 라는 의무감을 이마에 붙이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화자에 몰입했다. 곤경에 빠진 그를 내 일처럼 다독였고, 애인처럼 절실한 마음으로 보살폈다. 그의 속사정을 들어주지 않으면 오늘 밤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 글을 쓸 수 없었던 이유는 명백하다. 오늘 연달아 보고서를 써서 눈이 흐리멍덩했다. 미세한 편두통이 와이파이 신호처럼 뒷골을 울렸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렇게 피로한 상태로 글을 쓰면 거진 다 난지도행이다. 이 귀중한 평일 저녁을 공치느니 소설이라도 한 권 떼는 게 더 낫다고 위안했다. 이건 타협도 아니고 변명은 더더욱 아닌 게 아직 마감이 사흘이나 남아있다. 오늘 잘 놀다가 내일쯤 초고를 잡고 모레 완성하면 되지 뭐. 그래 그게 좋겠네. 나는 저리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로 옮기고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다음 장을 폈다. 오늘은 딴짓하지 말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지. 내일 개운하게 출근하면 글도 더 잘 써질 거야. 난 카페를 그득 메운 인파를 가로질러 커피를 리필한다. 속이 출출하니 쿠키도 덤으로 산다. 그제야 난 오늘이 마치 어제를 복사해 붙인 것처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자각했다.


최근에 자주 눕는다. 누워서 볼 수 있는 독서대를 산후로 눕는 게 즐겁다. 대자로 누워서 눈동자만 움직여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책을 놓쳐서 잠이 깨는 사태를 미리 방지할 수 있다. 문장을 따라가다 서서히 잠들 수 있다. 꿈에서 소설 속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아직 잘 이어지진 않았다. 폴 매카트니는 꿈에서 렛잇비를 작곡했다던데, 내 꿈은 온통 후회와 치기에 휩싸여있다. 그래도 허벅지 사이에 베개를 끼고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책을 읽으니 내 저녁 시간이 더 윤택해졌다. 목에 주름도 안 지고, 디스크 예방도 된다. 무엇보다 전보다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우려와 달리 생긴 것도 보면대처럼 보여서 중환자실 병상 같은 느낌도 나지 않는다. 난 거금을 들여 이 거추장스러운 독서대를 주문하기까지 당위를 찾아내느라 힘을 뺐다. 누군가 이걸 왜 샀냐고 물어볼 게 겁이 났는지 몰스킨에 여러 이유를 적어놨다. 내가 글을 쓰는 패턴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내 아둔한 경험을 마치 비망록을 적는 것처럼 늘어놓고는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안심하는 과정이다. 마치 일급 변호사를 고용한 것처럼 주절주절 잘도 나를 대변한다. 물론 잘 될 턱이 없지만, 변명도 잘 쓰다 보면 그럴싸한 이데올로기로 둔갑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공들여 적은 문장을 다시 읽으면 좁쌀만 한 미덕이라도 건져 올릴 수 있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브런치를 열고 지난 3년간 내가 쓴 글을 하나씩 읽어봤다. 몹시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전혀 나 같지 않은 생경한 기운도 풍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의하면 자신이 쓴 글은 어릴 적 헤어진 핏줄과 같다던데, 내 글은 지나치게 위악적이고 침울해서 도대체 나랑 같은 배에서 나온 녀석으론 보이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자기 안에 이런 타자를 품고 사는 걸까. 자기이면서 자기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기인 줄도 모르고 딴청을 피우는 그런 면모가 있는 걸까. 어쩔 땐 조증에 가깝게 호들갑을 떨다가도, 그게 부끄러워 그다음엔 회한에 가까운 한탄을 늘어놓는다. 이런 번잡한 감정 기복을 위해 텅 빈 백지가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무실이나 명동 한복판에서 내가 쓴 대로 행동했다간 금세 매장될 테니 텅 빈 백지에서만큼은 신경정신과 소파에 앉은 사람처럼 막힘 없이 술술 털어놓는다.

당시엔 그렇게 공들여 적었는데 비문과 사족이 난무하다. 이제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내 핏줄은 서툰 작가다. 그래도 그는 매사 뉘우침을 밥 먹듯 한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와 허튼 생각을 자책하고, 난 에둘러 괜찮다고 다독이며 글을 하나씩 고쳐 잡기 시작한다. 더 정확한 글이 되기 위해 문장을 단단하게 다지는 데 공을 들인다. 비록 글로 꾸며낸 자신에 불과하지만, 어찌하든 고쳐 살아야 할 거 아닌가. 인스타그램 부계정을 삭제하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요설이 난무하는 곳에서 잡초를 뽑아내는 마음으로 힘을 들인다. 막 움트기 시작한 새싹에 물을 흠뻑 적시는 느낌으로 그렇게 내 글에 자신감을 찾아간다. 고쳐갈수록 사소한 경험이 비로소 얼개를 드러내고, 무의미의 구렁을 벗어나 타원형의 곡선을 그리며 문학이라는 땅에 안착한다.


최근 술자리가 잦아지니 주위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털어놓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쓸데없이 솔직해져선 아무도 묻지 않은 얘기를 술술 꺼내놓는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내 지난 연애담을 마치 주말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털어놓는다. 백열등 불빛과 살짝 올라오는 취기에 젖어 구구절절 아주 작은 사건 하나를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어느 순간 난 내 자의식 과잉에 놀라 퍼뜩 정신을 차리지만, 그땐 주위 눈길이 무서워 술잔만 물끄러미 응시한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세계 바깥에 도통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사실 관심 자체가 없어서 평소에도 흠칫할 때가 있다. 늘 안으로 침잠하고 속으로 결론짓는 데 익숙하다. 혼자 감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그래서 술을 빌려 솔직함을 가장했다가 다음 날이면 이불자락을 걷어차는 짓을 반복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술자리에서 뭔가를 기대하는 이유는 다정한 눈빛들 때문이다. 술잔을 꼭 붙잡고 타인의 삶에 너나 할 것 없이 공감과 위로를 보낼 줄 아는 그들. 내 조잡한 초고를 읽어주고, 깜깜한 벽 앞에서 요추가 굽을 때도 일일이 지적해준 그들. 그들 덕에 난 오늘도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