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벚꽃 놀이가 남긴 추억의 부스러기
작년엔 벚꽃 놀이하려고 마포구 일대와 여의도를 걸었다. 새로 산 셔츠를 입고 백탁 크림도 발랐다. 인파에 섞여 맛집을 찾아가고,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잔에 내주는 커피도 마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좋아 보였다. 꽃이 흩날리고 실바람이 부니 좋지 않을 수가 없지. 이런 행복은 드문 일이니, 사진도 남겼다. 그 참에 카카오톡 프로필도 바꿨다. 잘 조율된 삶을 사는 기분이었다.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는 제대로 된 봄의 제전. 남들 못지않은 삶을 누리고 있다는 만능감이 피어올랐다. 집으로 가는 152번 버스 안에는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한 뭇 젊은이들이 고개를 파묻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려댔다. #벚꽃스타그램 태그를 붙였으려나. 벚꽃놀이를 마친 서울을 비추는 서쪽 유리창에 황적색 저녁놀이 와닿았다.
차창에 기대 눈을 감으니 다시 속내가 복잡해졌다. 며칠 전부터 이어지던 고민이 계속됐다. 날 갉아먹고 옭아매며 놔주지도 않는 골칫덩이 같으니. 어디에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삭였다. 집에 들어와서 구겨진 옷에 섬유 탈취제를 뿌리고 걸었다. 어제 먹고 밀린 설거지를 하고 바닥에 허물처럼 벗어놓은 빨랫감도 다 주워 세탁기에 넣었다. 욕실에서 땀에 젖은 몸과 텁텁한 입을 씻어냈다. 기분이 멀끔해졌지만 이 오질 않았다. 눈을 감을라치면 스멀스멀 불길한 형상이 몰려왔다. 별수 없이 노트북을 켜고 고민하는 바를 적어냈다. 속에 얹혔던 낙지를 토해내듯 웩. 컴컴한 어둠 위에 토해진 낙지의 꿈틀거림과 뒤돌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과 어찌 보면 체념에 가까운, 그러나 다시 현실감각을 깨우치는 공기의 딱딱한 울림. 어쩌면 봄이 오지 않았다면 없었을 생각들. 아마도 겨울을 지나치지 않았다면 결단했을 이별. 거룩한 계절. 만물의 기적. 이런 심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살이 에는 꿈같았다. 새벽 기분에 취해 다 쓰고 보니 주방에 찌든 얼룩 같은 글이었지만 뭐 그리 나쁘진 않았다. 브런치에 올리려고 적당히 사실관계를 흩트려서 내 흔적을 지워냈다. 업로드 완료.
행복에 겨운 날에도 비극을 떠올리는 게 내 특기다. 삶이 뭔가 풍요롭고, 만족할라치면 지겨움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 속은 꽤 복잡한 거라고 말해주는 작가를 좋아한다. 레이먼드 카버나 이승우, 포크너, 필립 로스 등등. 그들을 읽으며 나만 비정상은 아니라는 모든 증거를 수집한다. 온전한 정신과 균형 감각을 지닌 인물이 그릇된 선택으로 나락에 빠지는 이야기에 환장한다.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말하는 일종의 쌤통 심리랄까. 혼자 죽진 않겠다는 물귀신 심보지 뭐. 비극의 서사를 읽고 안도한다. 나는 저 인간말종보다는 나쁘진 않으니까. 그래서인지 소설이 조금만 밝고 낙천적이면 시시하게 느낀다. 어이구 행복하셔라.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복하면 다야? 해피엔딩이 아니면 장사가 안되니?
내가 쓰는 글도 조금만 긍정적일라 치면 다 지워버린다. 벚꽃놀이를 한 날 밤에 뭣같이 된 글을 쓰는 게 말이나 되나. 내 기저엔 모든 게 안정적인 건 우연일 뿐, 인생의 본색은 고되고 힘들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그래서 독서 모임을 해도 밝은 기질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사람에겐 인색하다. 저 속엔 뭔가 구린 게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루하루 희망에 차서 의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그런 평범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는 게 왜 그렇게 싫을까. 요즘 말로 '관종'인가.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축복을 왜 부정할까. 고뇌하는 젊음은 멋이라도 있지, 이 나이에 이렇게 비관적이면 건강검진받은 지가 언제냐는 소리나 듣는다.
내가 주로 쓰는 글은 별 내용이 없기 때문에 아무 주장이나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글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포괄하고 있다. 그건 나조차도 내가 뭘 쓰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줄곧 내 재능을 의심해왔고, 아무리 노력해봤자 내 예술적인 야심을 달성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에 고삐가 풀린 채로 쓴다. 역시 관종답게 내가 남들과 달리 왜곡된 상태라는 걸 알리는 게 좋다. 어딘지 모르게 욕망으로 가득 찬 사회의 불순분자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겉으로 보면 되게 반듯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시커멓다는 걸 드러내고 싶다.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다 적으면 문제가 될 터이니, 내 정보를 흐릿하게 변형해서 이게 지금 현실인지 허구인지 나조차도 헷갈리게 쓰고서는 모른 척하고 싶다. 책에서 읽은 건지, 뉴스에서 들은 건지, 어디 술자리에서 들은 건지 출처도 잘 모르는 것을 내 맘대로 해석해서 쓰고는 나 몰라라 한다. 그렇게 매일 엇비슷한 일과를 보내는 내가 유별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사무실에서 회의할 때는 말없이 수첩에 복슬복슬한 양들을 그려도, 벚꽃을 보고 온 밤에는 가차 없이 그 양들을 죽인다.
작년엔 내 연애에 관한 글을 여러 편 썼다. 오그라들지만 과잉의 감정을 여과 없이 불어넣었다. 연애에 관한 단상이 떠오를라치면 포스트잇에 적었다가 매일 밤 글로 풀어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작, 널 만나서 기뻤고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고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는 고마움의 표현이었지만 그걸 최대한 길게 늘어뜨려서 적었다. 연애가 마치 불행의 총체인 것처럼 엄살을 떨다가, 외로움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굴었다. 그렇게 다 쓰고 생각한 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사랑이라고 힘주어 말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집착, 광기, 자기 파괴 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관한 무수한 말을 떠들어대지만 그건 사랑의 주변부에 불과한 게 아닐까. 누가 사랑의 중심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런 건 가짜들이나 하는 짓이다. 내가 읽어온 일류 작가들은 무력한 펜대를 다시 움켜쥐고 사랑 대신 사랑이라는 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사랑이 말해질 수 없다 하더라도 사랑을 말함으로써 내가 겪은 사랑이 초라해지지 않도록 있는 힘껏 다시 썼다. 그건 그 자체로 예술론이자 인생을 사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쉽게 다다르지 못함이야말로 예술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신이 사랑은 초콜릿 상자라고 딱 잘라 말하지 않았으니, 예술가는 더 맘 편히 사랑에 관한 온갖 잡소리를 풀어낼 수 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연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그게 뭘 남겼는지도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렇다면 내가 왜 문학을 좋아하는지도 대답이 가능하다. 인간 조건을 규정하는 도덕적인 딜레마를 포함해서 보편적 주제의 창작물까지 왜 나는 그렇게 읽고 보고 써댈까. 처음엔 내가 무지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 나이를 먹고 보니 삶이 늘 우환덩어리고 커다란 불만이며 원하는 걸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학은 한 번 살아서 늘 부박하고 단 한 번뿐이라 아쉬운 내게 서프라이즈의 재연 드라마처럼 과거를 불러낸다. 불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에게 귀착된다는 점에서 재귀적이다. 후회로 얼룩진 대지에서 까치발을 들고 도약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