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짐승은 어떻게 사랑의 비틀림을 그려내는가
몇 주 전 쓰시마 유코의 책을 읽고 싶어 책더미에서 <슬픈 짐승>을 뽑아 들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딸은 어떤 작품을 썼을까. 보나 마나 병적으로 구는 사람이 변태적인 짓이나 하는 작품이겠지 뭐. 난 이런 우스갯감을 떠올리며 일요일 오후 텅 빈 시간에 소설을 폈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패전 직후의 일본 사회로 들어갈 채비를 갖췄다. 근데 막상 책을 펴니 1989년 통일 직후의 베를린에 도착해 있었다. 분명히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는 줄 알고 귀미테를 붙였는데, 12시간짜리 베를린 직항 항공기에 앉아있었다. 당황해서 책을 들추니 작가 이름이 '모니카 마론'이었다. '뭐야 이게.' 검색창을 두드려보니 내가 읽고 싶었던 쓰시마 여사의 책은 <웃는 늑대>였다.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제목인 <슬픈 짐승>을 고르다니. 같은 문학동네 전집에 묶여서 헷갈렸나 보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니 모니카 여사님과 함께하는 독일 여행도 나쁘지 않았다. 몇 년 전 짧게 여행했던 베를린 도시의 풍경이 떠오르면서 그 현대적이면서도 스산한 분위기에 휩쓸렸다. 책이 얇은 데다가 내가 사랑하는 불륜 스토리라 부쩍 흥이 났다. 역시 늑대보다는 짐승이 낫지.
때는 독일 통일 직후, 동독 출신의 화자 '나'는 서독에 살던 남자 프란츠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모두 아내가 있지만 우연한 만남 이후 불타오른다. 차이가 있다면 여성화자 '나'는 사랑을 위해 가정을 포기했는데, 프란츠는 두 집 살림을 오가며 그녀를 만난다. 멀티태스킹을 하는 쪽은 늘 사랑을 나눠줘야 하기에 남겨진 화자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소설의 제목처럼 짐승이 왜 슬픈지 알만했다. 화자에겐 인생을 건 사랑이지만 프란츠에겐 그저 외도에 불과하다. 관계의 농도가 다른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끝내 파열해 나자빠진다.
소설의 시점은 두 사람의 사랑이 소멸하고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다. 여성 화자는 노년이 되어 알츠하이머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미약한 기억을 붙잡고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었던 프란츠를 회고한다. 소설은 대놓고 파편적이며, 불분명한 기억과 망상을 뒤섞어 도통 진위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실험적인 형식은 점점 기억이 소멸해가는 화자를 영원한 사랑 안에 가둔다. 강렬했지만 실패한 사랑이기에 결코 미소 지을 수 없는 구렁텅이에서 신음한다.
소설을 다 읽고 한숨을 푹 쉬었다. 실패한 사랑은, 아니 버려진 연인은 날 뒤흔들고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책을 다시 펼쳐보니 내가 친 무수한 밑줄이 마치 폭격의 잔해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는 회한이 모니카 마론의 문장 곁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화자를 짓누르는 처절한 감정 묘사가 내 시뻘건 밑줄과 함께 파괴적인 기억을 뱉어냈다. 작가 모니카 마론은 '나'가 홀로 신음하고 고통받는 대목을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거칠면서도 섬세하고 묘사했다. 속내를 조각칼로 오려낸 것처럼 날이 서 있어서 자꾸만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노년이 되어서도 지나간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다면 인간은 정말 슬픈 짐승이 아닐 수 없다.
어둡고 슬픈 소설이지만 <슬픈 짐승>은 마치 김연아의 레이백 스핀처럼 힘이 넘치고 우아한 문장을 지녔다. 한때 김연아가 연기했던 하탸투랸의 1939년 왈츠 <가면무도회>처럼 슬픔과 고통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묘사가 압권이다. 정곡을 찌르는 문장엔 가슴을 꿰뚫는 힘이 있다. 그래서 난 내상을 입은 채 옮겨 적기에 바빴다. 한 번도 다가서진 못한 고유한 감정을 발견한 것처럼 늦은 밤까지 화자의 고통에 침잠해서 베갯잇을 적셨다. 한숨을 내쉬면서도 마저 다 읽어버렸다.
화자가 자꾸만 변명으로 일관하는 프란츠를 놓지 못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번번이 속고도 그냥 믿어버리는 거구나. 내게 돌아올 거라는 믿음, 나만 사랑할 거라는 믿음,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은 실로 터무니없지만, 사랑에 빠진 자는 앞뒤 가리지 않고 포용하는 거구나. 옆에서 보기엔 한심하고 바보같이 이용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사랑이구나. 사랑이 지닌 비이성적이며 맹목의 믿음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화자인 '나'는 무너지는 와중에도 프란츠를 옹호하고 그의 입장에 서기를 멈추지 않았다. 연민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지만 그게 사랑이라면 자기는 안중에 없이 그를 싸고돌게 마련이다. 한 치의 희망에 모든 걸 내팽개치고 다 걸어버린다.
<슬픈 짐승>에서 가장 마음이 저렸던 대목은 프란츠가 화자와 섹스만 하고 바로 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 순간이다. 그녀는 버려지기 싫어서 조르고 달래고 화를 내며 온갖 수를 써서 그를 붙잡지만, 프란츠는 무심하게 등을 돌린다. 자신의 견고한 삶 속으로 복귀하기 위해 막차도 끊긴 어두운 거리로 나선다. 한 번 정도는 그녀의 곁에서 자고 갈 법도 한데, 대충 둘러대고 하룻밤은 그녀의 몸에 자신을 맡길 법한데 매정하게 떠나버린다. 쾅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제 공백이 그녀를 흔들어 놓는다. 어떻게 그는 연인 앞에서 늘 철두철미한 사람일 수 있을까.
난 누군가와 잠을 자다 보면 정말 잠이 자고 싶어 진다. 어느 순간부터 섹스는 곁가지가 되고 그와 함께 수면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해지기 마련이다. 사랑은 한낱 불타오르는 감각일 수도 있지만, 느지막한 온기일 때가 찾아온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테레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밤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관계에 있어 필연적이다. 결국 이쯤에서 사랑 전도사를 자처하며 이런 말을 써본다. 사랑은 농도가 아닌 시간이 아닐까. 더 긴 시간을 선물해주는 것이야말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일상적인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 이별은 사소한 많은 것을 앗아간다. 그와 습관처럼 주고받던 우스갯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우리만 아는 의식과 같은 대화, 몸을 비비던 살결의 냄새가 애틋하리 만큼 소중해진다. 문밖을 나선 그는 마구 뒤섞인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을 남기고 떠났기에 더 잔인해졌다.
불륜이 등장하는 소설이 독자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건 익명성에 있다. 금기와 은밀함이 결합하면 그 무엇보다 달콤하지만, 정당화할 수 없는 감정이기에 쉽게 지친다. 누구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어서 비참해진다. 나도 내 곁에서 종종 불륜으로 일을 그르친 분들을 뵀다. 사랑은 어쩔 수 없이 빠져든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완전히 나자빠진 사람들이었다. 사랑을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 가진 치명적인 위험을 방치한 죄다. 프란츠는 화자를 방 한구석에 몰아넣고 기밀의 사랑을 휘둘렀다. 프란츠에게 그녀는 한낱 배음에 불과했던 걸까. 평생 홀로 남겨진 화자는 이제 상상 속에서 고통받는다. 프란츠가 아내와 나눌 섹스를 떠올리고, 아내와 함께 보내는 사사로운 장면에 신음한다. 레스토랑에서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걸 떠올리며 질투하고 시샘하며 끝내 그의 부인을 찾아가서 격정을 토해낸다. 인정받고 싶어서, 그를 온전히 내 것으로 가두기 위해서 마지막 수를 쓴 셈이다. 프란츠는 대체 왜 그랬냐고 백 번은 더 물었지만, 그걸 말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슬픈 짐승>이 통속 소설로 보이지만, 작품의 백미는 그 통속 안에 내처진 속내에 있다. 누구나 금기에 매달리고, 거기서 빛과 어둠을 보고 온 바가 있을 테니까. 화자의 고통에 나를 이입해서 가라앉혀진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 헤어진 연인을 그리는 광기와 망상은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떠올리는 감각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다. 통속은 인위적이지만 그 안에서 걸어가는 개인은 오롯하니까.
소설은 기억을 잃기 시작한 이래 오직 프란츠라는 운명의 연인에 골몰했던 여인의 삶을 비추며, 우리가 죽을 때 과연 마지막까지 떠올릴 만한 일이 사랑 아니고서야 있기나 한지 되묻는다. 비록 실패하고 인정받지 못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과연 그 사랑을 빼고 인생에 있어서 남길만한 가치가 있는 게 뭐가 있겠냐며. 난 화자가 프란츠를 사랑했던 것만큼 지독한 연애를 해봤던가. 기억의 진창을 뒹구는 자는 그렇다고 하는데, 난 그의 손을 잡아줄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슬픈 짐승>을 읽는데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가 떠올랐다. 동료이자 나이 많은 유부남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와 사랑에 빠진 가브리엘레는 불륜녀 딱지를 달고 8년간 그와 사귄다. 칸딘스키는 러시아에 있는 본처와의 이혼을 약속하고 가브리엘레를 계속 만났지만, 끝내 가브리엘레를 버리고 새로운 여자와 재혼했다. (그것도 더 젊고 아름답고 집안도 좋고 돈도 많은 여자와) 가브리엘레는 이 당시의 절망을 편지로 남겼다. "나는 경험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여기에 쏟은 노력과 작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두 사람이 뮌헨 남부의 작은 작업실에서 보냈던 꿈결 같던 시간도 그렇게 빛이 바랬다. 이제 한때는 인생의 전부였던 경험들이 지하창고에 처박혀 녹이 슬어간다. 인생에서 버림받은 사람이 미술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사랑에 버려진 개츠비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버리고 죽음에 투항했고, 홍상수는 영화에서 다른 걸 열심히 하는 이유는 사랑을 하지 못 해서라고 쏘아붙였다. 나도 사실 비슷한 생각을 한다. 예술이니 경험이니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 건 다 사랑을 잃고서 버티고자 하는 허튼짓 아닌가. 가브리엘레는 사랑을 잃고 더는 붓을 잡기 어려웠고, 죽을 때까지 우울증에 시달렸다. 눈 내린 추운 겨울, 아침에 차 한잔을 따라놓고 생각에 빠진 그녀를 상상해본다. 그녀의 뒷모습은 슬픈 짐승이라는 수사가 퍽 잘 어울린다. 겨울의 냉기가 창밖에 선하고 아무 말도 없는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빵 한 조각만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그림 속에 박제되어 한없이 바라본다. 가브리엘레도 칸딘스키를 끝내 그리워했을까. 난 소설을 읽는 내내 화자에게 가브리엘레를 투영했다. 우연히 본 이 그림을 더는 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슬픈 짐승>은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깊숙이 자리하지만, 결국은 사랑이라는 보편의 감정을 끝까지 파고든 작품이다. 생의 끄트머리에서 사랑만 붙들고 소멸하는 이야기다. 슬픔에 완전히 잠식된 사람만 내뱉을 수 있는 기운이다.
* 커버 사진은 영화 <더 리더>의 사진인데, 독일인이라는 공통점 외에 무관합니다. 분위기가 어울려서 그냥 넣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