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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용 May 19. 2020

봄 산책


"비둘기가 스스로 먹이를 찾을 수 있도록 먹이를 주지 마세요." 

공원에서 이런 플랜카드를 만났을 때, 나는 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봐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모질고 단단한 마음을 갖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저 플랜카드를 떠올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원을 좀 걸었습니다. 길 한가운데에는 물웅덩이가 있었고 참새 두 마리가 물도 마시고 몸도 담갔습니다. 목욕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 기다렸습니다. 출입 금지 구역 너머에서 거북이를 만났습니다. 거북은 손바닥만 한 등껍질 속에 숨어 몸을 움츠리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길에서 거북이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던가.' 생경한 광경에 어지러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그 너머로 사람이 갈 수 없는 길에는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회색 고양이도 보였습니다. 한 바퀴를 돌고 오니 거북은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습니다.


할머니 손등처럼 메마른 나무 틈 사이에서는 뽀얀 은행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곧 여름이긴 여름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개구리 울음소리도 그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이번 봄과 여름은 유난히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입니다. 그만큼 지난 1년은 길고 촘촘했습니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7시 45분. 깨끗하게 떨어지는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이때 저녁이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8시가 되니 나무 냄새가 짙어졌습니다. 조명 위로는 밤벌레가 피어올랐습니다. 하늘은 연보라였습니다.


버드나무 사이로 강과 건물들과 빛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바라보는 풍경에 너무나 쉽게 익숙해졌습니다. 바라보는 모든 것에 기뻐했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과거를 쉽게 잊었습니다. 과거에 내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 현재의 내 삶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었을 때(혹은 그렇다고 믿기 시작했을 때), 나는 벗어났다고 느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봄 산책을 하며 내 삶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마치 교회를 가는 것처럼 고백과 속죄의 의식이었습니다.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떠오르는 상념은 다음 일주일을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했고, 더 제대로 해내야겠다는 부채로 남기도 했습니다. 그 규칙적인 리듬감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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