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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 Feb 18. 2019

바야흐로 졸업의 계절

매년 맞이하지만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것.

NEIS, 이지에듀, 졸업식.


이 셋은 신기할 정도로 기억 속에서 매년 리셋되어 날 신규의 초심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이제 학교에서 마냥 어리다고 할 수 없으니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데 저 삼대장 앞에서는 답이 없다. (나만의 노답 삼형제) 앞의 둘을 해결하기 위해 나만의 노트를 만들기도 하고 동영상으로 작업 과정을 남겨보기도 했다. 1년 뒤의 나에게 보내는 매뉴얼인 셈인데 나중에 이 자료들을 찾으려고 하면 꼭 행방불명이다. (이쯤되면 내가 제일 노답이 아닐까?) 그런데 마지막인 졸업식은 매뉴얼로도 극복이 안 된다. 아무리 '내년에는 덜 슬프자!'라고 다짐해도 늘 슬픈 탓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사람 사귀는 것을 좋아했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명이 다 다른 드라마 속의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씩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지금 누구와 무엇을 하러가는 중일까? 하는 상상을 했다. 성인이 되면서 사교 기술이 늘고, 나이에서 오는 능청스러움이나 심적 여유가 생기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러 가기도 했다. 내 삶에서 겪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그 느낌이 좋았다. 물론 내가 관계지향적인 사람이 된 이유에는 인간과 맺은 대부분의 경험들이 긍정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처음 본 사람에게도 쉽게 마음을 주고 잘 믿는 편이다. 이걸 보고 어떤 이는 나쁜 사람에게 당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그렇다. 나는 재물당첨운은 없어도 인복이 많은 사람이란 걸 인정한다.


아무튼 관계지향적인 사람에게 교사라는 직업은 참 만족스럽다. 하루에도 수십명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직업은 교사말고도 이미 많겠지만 나에게 적대감보다는 우호감을 가진 상대들과 하루종일 함께 하는 것은 매우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요즘 아이들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영혼이 맑고 순수한 아이들이 아직은 더 많다. 그런 아이들과 1년간 깊은 유대를 맺다가 어느 순간 분명히 헤어져야 할 시점이 온다. 그게 졸업이다.




첫번째 졸업식 때는 초임 발령받아 가르친 띠동갑 제자들을 보내야 했다. 이 아이들에게는 처음의 특별함이란 특별함은 다 있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코가 빨개지고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울었다. 애들보다 담임이 더 우는 반이었을지도 모른다. 졸업식이라 애들이랑 마지막 사진을 찍어야 하긴 했는데 토끼마냥 눈도 코도 다 빨개진 나를 보고 한 학부모님은 '어머 어떡해~선생님 우시니까 저도 슬퍼요.'하면서 같이 우셨더랬다.


두번째 졸업식 때는 4,5학년을 연임하고 6학년을 옆에서 지켜봤던 제자들의 졸업이었다. 이 녀석들은 좀 특별했다. (이제보니 특별하지 않은 애들이 없었군) 우리집에 놀러와서 내복 바람으로 자고 간 녀석들도 있었고 5학년 때는 수업 혁신학년으로 지정되어 함께 이런 저런 추억들을 많이 쌓은 아이들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함께 했던 아이들이라 졸업식 전부터 슬펐다. 내내 잘 참다가 엄마랑 인사하러 온 아이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얘기하며 눈물 흘렸던 기억이 있다. 눈이 마주치면 더 울 것 같아서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먼 산을 보며 마지막 인사를 했던 게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다.


올해는 세 번째 졸업식이다. 이 녀석들은 5학년 때 담임으로, 6학년 때는 교과전담으로 가르쳤던 애들이니까 역시 연임한 셈이다. 이맘때가 되면 감정적으로 쳐지게 되는데 졸업 시켜서 시원하기보다는 섭섭의 감정이 더 크기 때문이다. 졸업식은 감정소모도 커서 '내년에는 정 좀 덜 줘야지, 너무 힘들다.'하는 생각도 매번 하게 된다. 그래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애들이다. 2년 내내 멀리서부터 달려와 '쌤~'하면서 안기는 발랄한 아이, 공부는 못 하지만 엉뚱하고 순수했던 아이, 무거운 거라도 들고 있으면 '제가 할게요.'라면서 짐을 나눠들었던 다정한 아이, 늘 쉬는 시간에 먼저 와서 '이번 주말에는 뭐하셨어요?' '보헤미안 랩소디 보셨어요?'라면서 인터뷰를 했던 살가운 아이, 내가 무엇을 하든 박수 짝짝치며 박장대소 해준 아이들이 다 있었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이번 졸업식에서는 6학년 아이들이 졸업공연으로 사물놀이를 했다. 내가 근무했던 영어실 바로 위가 음악실이라, 종종 아침을 장구와 꽹과리 소리로 시작했던 적이 있다. 더웠던 여름을 지나 낙엽지는 가을에도 눈 내리는 겨울에도 아침마다 사물놀이 가락은 계속 울려퍼졌다. 매일 아침 복도와 창문을 넘어 점점 완성되어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아이들과 나 사이에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좀처럼 느낄 수 없었는데, 마냥 애같고 장난스러운 아이들이 멋진 검정색 한복을 입고 졸업식장에 들어설 때야 비로소 느끼고 말았다. 무대 아래에서 단단한 눈빛으로 아이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선생님과 수업 시간과는 다르게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장구를 치고 북을 치고 꽹과리를 두드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약간 눈물이 났다. 이제 또 마지막이구나.




내가 졸업했을 때 우리 선생님은 어땠더라. 나처럼 우셨던가? 기뻐하셨던가? 졸업식을 회상해보니 선생님의 뒷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이야기를 하시고, 우리는 줄을 서서 선생님과 사진을 찍었다. 선생님은 내가 돌아보면 거기에 서서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셨다. 내가 교사가 되어보니 선생님의 뒷모습이 기억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농담처럼 이제 졸업시켜서 시원섭섭하다!고 말을 하면서도 졸업식장을 나가는 내내 아쉬워서 마주치는 아이마다 한 마디라도 말을 더 걸고 한 명이라도 더 안아주고 교실 창문에 매달려서 그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게 선생님이다. 우리 선생님도 아마 제자들 가는 길에 뒷모습을 보이지 않고 열심히 웃고 손 흔들어 주셨겠지. 내가 내 제자들이 꽃길만 걷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축복하는 것처럼.


교사라는 직업이 만남과 헤어짐을 매년 반복하는만큼, 이별에 무뎌지는 게 나를 위해 현명한 선택일까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 이별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지는 날이야 오겠지만 아직까지는 좀 바보같아도 실컷 슬퍼할 생각이다. 매해 날 것처럼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좋다. 어쩔 수 없이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슬픔이 있는 것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마 따뜻한 5월이 되면 중학교 교복을 입은 녀석들이 달려와서 반갑게 안길 것이다. 그럼 그걸로 됐다. 다시 행복할 수 있으니.


2019.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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