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참석한 인성교육 동아리 모임에서 유리 작가의 「돼지 이야기」라는 책이 소개되었다. 「돼지 이야기」는 동물 복지 관점에서 바라본 돼지의 삶에 관한 기록이다. 가로 60cm, 세로 2m 남짓한 공간에서 사육되는 돼지가 생명으로서의 존엄을 잃은 채 결국 구제역으로 인해 살처분으로 삶을 마감한다. 아주 끔찍하지만 보편적인 이야기이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지만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다. 그림책을 보면서 속으로 방금 전까지 동아리 회식 메뉴로 항아리 삼겹살이 선택지에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 돼지는 불쌍한데, 삼겹살은 너무 맛있으니 마음이 불편하다.
「돼지 이야기」를 읽고, 각자의 경험들이 공유되었다. 한 선생님 반에는 이 책을 좋아해서 몇 번이고 읽어달라 조르는 아이가 있다고 했다. 슬픈 이야기 책을 매번 너무 즐거운(?) 마음으로 골라오니 아이의 심리가 궁금했던 선생님이 '넌 이 책이 왜 좋니?'라고 여쭤보셨단다. 그랬더니 돌아온 아이의 대답은 '돼지가 이렇게 많이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였다고.
다른 선생님은 아들과 뼈 치킨과 순살 치킨 중 어떤 것을 시킬까로 논쟁하다가 이것이 결국 동물복지에 대한 논의로까지 번졌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닭이 살아있는 순간만이라도 생명으로서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들은 '어차피 죽을 건데 그렇게까지 해야 돼?'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선생님은, 보편적 가치라고 생각했던 생명 존중의 가치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한 좌절감과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개인의 양심적인 행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신 듯했다.
경험을 공유하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다수가 느꼈던 감정들은 비슷했을 것이다. 어떤 도덕적 가치의 수용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느껴지는 좌절감이나 '내가 이런다고 세상이 변할까?' 하는 숱한 회의감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인성 교육이 학교 현장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어차피 죽일 거면서 동물을 위한 복지니 뭐니 하는 행동들이 위선적이라고 비난한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게 있어 계란을 고를 때 이왕이면 방사란을 선택하거나 동물복지 마크가 있는 제품을 선택하는 것은 위선보다는 최소한의 양심에 가깝다. 신세를 진 상대에게 최소한 미안함과 감사함을 갖는 것.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이 최소한의 양심들이 모여 다수가 되었을 때 나온다고 믿는다.
사실 내가 아이들에게 너희가 모르는 이런 세상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가치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들 세상이 크게 변할 것 같지는 않다. 30명의 아이들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설교하면서도 그 가치를 제대로 실천하고 사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손에 꼽을지도 모른다. 나도 도덕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내가 제공하는 교육을 통해서 아이가 도덕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크지는 않다. 거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매년 거대하게 녹아내리는 북극의 빙하처럼,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일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내가 이걸 계속하는 게 맞는지 회의감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 속에 지나가는 누군가를 붙잡아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는 건, 그 사람이 가진 최소한의 양심으로 우리가 가는 길에 합류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한 명의 투철한 비건보다 백 명의 사람이 고기 몇 점을 덜 먹는 것이 낫고, 한 명의 투철한 제로 웨이스트 실천가보다 백 명의 사람이 쓰레기를 한 줌 덜 만드는 게 낫다. 도덕 교육의 목표를 한 명의 투철한 성인군자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다수의 사람을 생산하는 것으로 본다면, 내가 걷는 일이 결코 의미 없거나 헛된 일은 아닐 것이다. 우연히「돼지 이야기」를 읽고 나처럼 가슴 어딘가가 찝찝하고 불편한 사람이 수천 명 생겼다면, 그것으로 변화는 천천히 시작되는 거니까.
2019.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