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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 Nov 26. 2018

찬욱이

우리 안의 우주


찬욱이는 늘 소매가 짧은 옷을 입고 다녔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이라도 되면 낡은 점퍼의 깡똥한 소매 아래로 나온 하얀 팔목에 마음이 시렸다. 더벅머리의 찬욱이는 글을 제대로 읽고 쓸 줄도 몰랐다. 읽기 책에 나온 지문을 읽을 차례가 되면 당황해하며 글자를 더듬더듬 읽었다. 한 번 읽은 것을 다시 읽고 또 읽었다. 그래도 반 아이들 중 어느 하나 찬욱이를 채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천사처럼 착한 찬욱이는 우리 반에서 보호받고 아껴주어야 할 존재였다.


찬욱이는 1년 터울의 형과 아버지와 셋이서 살았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두 형제가 같은 학년이었다. 찬욱이네는 아주 낡은 주택의 단칸방에 살았다. 가정 방문하는 날, 축축한 이끼를 밟고 찬욱이네 단칸방으로 들어서니 하루살이가 그 안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세간이라고는 작은 티브이에 옷장 하나가 다였고 그 옆으로 이불이 개켜있었다. 뱅뱅 도는 하루살이처럼 누군가에게는 하잘 것 없는 삶의 모습. 바람만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아주 처량한 삶의 형태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재력과 지적인 능력. 어느 하나 타고난 구석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찬욱이를 보면서 나는 점점 조바심이 났다. 중학생이 되기 전 글 정도는 제대로 읽고 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겼다. 그래서 방과 후가 되면 그 애를 잡아다 놓고 글공부를 시켰다. 조급함과 초조함은 늘 아이에 대한 화살로 돌아갔고 결국 찬욱이를 윽박질러 눈물을 보이게 하고서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사실 아이를 진심으로 걱정했다기보다는 내가 가르친 학생이 제대로 읽고 쓸 수 없는 상태로 진학을 한다는 것이 마치 나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애정이라는 그럴싸한 명목으로 이미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길에 버거움만 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누구도 애쓸 필요가 없는 일, 처음부터 소용없었던 일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1년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은 시간이 흘러 추운 겨울이 왔고 나는 찬욱이를 데리고 나가 학교 근처 가게에서 따뜻한 옷 한 벌을 사 입혔다. 일부러 몇 년은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긴소매의 옷을 사서 소매를 접어주면서 말했다. 찬욱아, 이제 선생님이랑 공부 안 해도 돼. 대신 찬욱이 손목이 시릴 일만 없었으면 좋겠어.





다시 7년이 흘러 전국이 폭염으로 지글거리던 여름, 한 손에 박카스를 들고 청년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수줍은 미소를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스무 살이 된 찬욱이었다. 세상에, 찬욱아. 복도 한 복판에서 너무 반가워 소리를 질렀다. 


7년 만에 만난 찬욱이는 회사에서 용접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교대 근무라 야간에 작업할 때도 있다고 했는데 주간에는 회사의 배려로 전문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학교 가는 길에 생각나서 들렀다고 했다. 놀라웠던 것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면서 찬욱이가 말을 한 번도 더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간간히 웃음도 지어가고 농담도 해가면서 천천히 대화를 이어나가는 찬욱이를 보며 생경함, 미안함, 신기함 같은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이제 아이가 아니라 성인이 된 그에게 ‘그 당시 내가 너를 많이 걱정했었고 조급한 마음에 몇 번 다그치기도 했지, 미안해.’라고 사과를 했으나 찬욱이는 예전의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잘 기억이 안 나는데요.’라고 나를 위로했다. 

그가 돌아가고 난 뒤 찬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박카스 병을 보면서 굉장한 짜릿함을 느꼈다. 말하는 법, 글 쓰는 법도 모르고 사회적 자본마저 갖추지 않아 가능성이 희박했던 아이라고 보기에는 찬욱이가 보낸 80글자의 문자메시지가 굉장히 정확하고 정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몰랐다. 누군가의 잠재력을 너무 얕보고 섣불리 판단한 잘못이다. 해봤자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건 내 무능에 대한 자기 합리화였고 방어였으며 비겁하고 부끄러운 사고방식이었다. 7년 동안 찬욱이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통해 이만큼이나 성장할 수 있었다면 필시 그가 가진 잠재력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 와는 별개로 그를 성장시킨 일련의 사건과 이야기들이 모두 순탄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나처럼 부끄러워도 하고 자책도 하면서 많은 페이지를 숱한 의심과 책임감,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써 내려갔겠지.  


흔히들 인간의 잠재력을 우주에 비유한다. 열 명의 아이가 있으면 열 개의 우주가 있고 삼십 명의 아이들이 있으면 삼십 개의 우주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삶의 형태는 제각기 다르고 지금 당장 내 눈 앞에서 보이는 것들도 천차만별이다. 찬욱이가 다녀가고 나서 깨달은 건, 단편적인 것만으로는 누군가의 가능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쪽의 페이지로 한 권의 역사서를 갈음할 수 없으며 인간은 결코 우주를 판단할 수 없다. 판단할 수 없는 불확실함에 모든 것을 거는 것. 확실히 교육이 매력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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