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 더 칠드런과 함께 한 표창원 의원의 아동학대 예방 강연 후기
2018.12.11.
애는 없지만 애 키우기가 쉽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매년 수십 명의 고객님(?)들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자식이란 무엇일까. 내 배로 낳았으니까 저게 나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내 세포로 태어난 개체는 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나 신기하게도 완벽히 나와 다른 인간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얘기한다. 내 배로 낳았지만 나도 내 새끼를 모르겠다고.
아마 키우다 보면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많았을 것이다. 사람을 키운다는 건 식물이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과는 다르다. 이 존재는, 자신만의 자아를 확립하고 있으며 의사표현이 확실하고 철저히 이기적이다. 그래서 부모는 이 존재들을 복종시킬 수단을 찾는다. 역시 제일 먼저 떠올리는 건 '힘'이다.
우리 부모님도 그래서 힘을 선택했을 거다. 그때는 아동학대라는 개념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고 엄마도 아빠도, 부모가 된다는 건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을 테니까. 고작해야 20대 후반인 젊은이 둘이서 우리가 낳은 자식 잘 키워보자고 으쌰 으쌰 하면서 매를 들었을 텐데 그들의 과오를 탓할 만큼 내가 완벽한 사람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맞았던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판단은 피해자가 한다. 그건 그냥 내가 그분들의 자녀이기 때문에 내가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뿐이다.
아동학대를 물리적으로 가하는 신체적 폭력이나 언어폭력, 모멸감, 방임 등으로 규정한다면, 나 역시 어린 시절 제법 다양한 아동학대 경험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생각건대, 맞고 자란 세대는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공유할 것이다. 손을 활용한 스매싱, 생활도구를 사용한 매질, 속옷만 입힌 채 집 밖으로 쫓아내기(강력한 수치심 느끼게 하기), 발코니나 작은 방에 일정 시간 가둬놓기, 무시나 차별 같은 정서적 학대, 경제권을 이용한 금전적 협박, 욕설 내뱉기 등. 크게 위의 범주 안에 있겠지만 내가 생각지 못한 창의적인 방식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게 함정이다.
교권 붕괴나 청소년 범죄에 대한 기사를 보면, 요즘 애들은 맞고 자라지 않아서 저런 일이 많다는 댓글이 달리곤 한다. 부모들이 자식 귀한 줄 알면 때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요즘 부모들이 너무 오냐오냐해서 대한민국의 앞날이 걱정된다는 식이다. 사실 '사랑하니까 때릴 줄 알아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비상식적이지만 '잘못했으니까 맞아야 돼.'와 더불어 오랫동안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말이었다.
어쨌든 나도 그런 패러다임 안에서 자랐다. 내 잘못이니까 맞아야지. 부모님과 선생님은 날 사랑해서 때리시는 거야. 고통스럽고 싫은 경험들이었지만 스스로 좋은 기억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체벌에 대한 이런 인식들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막음하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잘못한 사람은 맞아도 된다'는 방식으로 폭력을 정당화함으로써 또 다른 가해자를 재생산한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한 때는 나도 그러한 가해자였음을 고백한다.
첫 발령받아 온 학교에서 맡은 아이들은 기피 학년으로 꼽히는 6학년이었다. 우리 반에는 거의 한 학기가 넘게 지각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학부모님께 전화를 해도 한 학기가 가도 고쳐질 기미가 안 보이니까 나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게 된다. '늦으면 1분에 한 대'야.
그 말을 듣고 며칠간 지각하지 않던 아이는 정확히 3일째에 또다시 지각을 했다. 평소처럼 10분 정도 늦으면 차라리 좀 나았을 텐데 그 날따라 30분이나 지각을 했다. 선배 교사들은 6학년에게 기싸움에서 지면 안 된다는 소리를 늘 나에게 했었고, 어찌 됐건 '1분에 한 대'는 아이들 앞에서 뱉은 약속이니 교사로서 그걸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순순히 손바닥을 내밀었고 나는 회초리로 서른 대를 때렸다. 교실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나는 퇴근 버스 안에서 내내 그 애 생각을 했다.
'늦으면 1분에 한 대'는 두 사람 간의 합의에서 나온 약속이었을까? 내가 이것을 이행한 것은 아이들에게 내 힘을 과시하고 굴복시키기 위해서였을까, 진심으로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내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아이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앞으로 지각하지 않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확실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화가 났고, 날 화나게 만든 건 13살짜리 사람이었다. 그 어떤 사람도 약속 시간에 친구가 늦었다고 해서 그의 손바닥을 서른 대나 때리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친구는 어른이니까 때리면 안 되는 거였고 얘는 아이니까 때려도 괜찮은 거였다. 얼마나 무지하고 폭력적이었는지. 이 자리를 빌려 그 아이에게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
전주에 처음으로 눈다운 눈이 내린 2018년 12월 11일 저녁, 팔복 예술공장 카페 써니에서 강연이 열렸다. 세이브 더 칠드런과 오월의 봄 출판사가 주최하는 아동학대 예방 강연으로 강연자는 전직 프로파일러 출신이자 현직 국회 의원인 표창원 의원이었다. 사실 서울에서 이 촌동네까지 아동학대에 대해 얘기하러 오신 유명한 양반이 대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힘들었던 부분은 폭력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였다. 강연을 함께 들으러 갔던 동료 선생님께서, 오은영 박사가 부정 행동을 하는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무릎으로 단단히 가두고 진정이 될 때까지 눈을 바라보는 장면을 봤다고 했다. 그런데 순간 그러한 행동은 학대나 폭력이라고 할 수 없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이를 좋은 방향으로 개선시키기 위해 선택한 훈육 방식이 강제성을 띄고 있다면 폭력이라는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학대이고 어디까지가 훈육인가? 그 모호한 경계를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표창원 의원은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답변한다. 훈육과 학대를 경계 짓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사랑이라는 이 정서적 감정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모의 훈육에 사랑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가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부모는 훈육이라 생각했어도 어떤 것은 훈육이 되고 어떤 것은 상처로 남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힘이 없다. 그들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다. 아동학대를 받았던 경험이 있어 아버지를 끔찍이 증오하지만 의지할 곳이 아버지밖에 없어 그를 버리지 못하는 한 아이를 안다. 자꾸 사고 치면 고아원에 버릴 거라며 악을 쓰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아이는 손톱을 피가 날 때까지 물어뜯고 눈물만 계속 흘렸다. 아빠랑 같이 있으면 죽을 것 같은데, 아빠가 자길 버려도 죽을 거라고 한다. 그런 장면을 보면 대체 부모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눈물만 난다.
사람을 길러낸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눈 감을 때까지 어려운 숙제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아동학대와 훈육의 경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면 이미 훌륭한 부모다. 사랑해서 때린다는 말은 없다. 이 세상에 맞아도 되는 사람도 없다. 사랑은 결코 폭력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아직 폭력에 대해 무감하며 인권 감수성도 낮은 상태지만 분명히 진보하고 있다. 폭력이 아닌 훈육 방식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찾아가는 게 과도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다. 아이들은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기 위해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랑을 표현하고 끊임없이 인내하며 연구해야 한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 좋은 어른이 될 것이고, 그들이 만들어낼 사회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라는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