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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 Jan 21. 2019

좋은 학교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나는 소위 안 좋은 중학교를 나왔다. 


 가장 꼴찌 칸에 쓴 학교에 다니게 될 줄은 몰랐던 나는 입학 첫날부터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친한 친구들과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모든 중학교에서 다 떨어지고, 홀로 스쿨버스를 타고 20분은 가야 하는 학교로 3년 동안 매일 통학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떨어져서 새로운 장소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했던 낯선 외로움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어른들의 선입견이었다. 어른들은 우리 학교를 까진 애들이 많고 공부도 못 하는 꼴통 학교라고 불렀다. 어른들은 나에게 '어디 학교로 가니?'라고 물었다가 'D 중학교요.'라고 말하면 미묘하게 동정 섞인 눈빛을 보내곤 했다. 어디 학교 교복이 예쁜지, 누가 나랑 같은 학교를 썼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던 13살 어린이였던 나도 뜬소문에 겁을 먹기 시작했다. 상상 속의 꼴통 학교는 실제보다 더욱 몸집을 부풀려 거의 정글 서바이벌의 느낌으로 서있었다. '어딜 가나 지 하기 나름이지 뭐.'라며 나를 다독이는 엄마의 말씀은 흔들리는 눈빛 때문에 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상상과는 달리 꼴통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무척 순수하고 의리 하나는 끝내주는 애들이었다. 가을이면 트렌치코트를 입으셨던 멋쟁이 교장 선생님은 점심시간이 되면 코트 깃을 펄럭이며 아이들과 배드민턴을 쳐주셨다. 형편이 좋지 않아 반찬으로 볶은 김치 하나만 싸오는 친구도 있었지만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그보다 더 맛있는 김치는 없었다. 축제에서 친구들과 파르페를 만들어 팔았던 기억, 굳이 무대에 올라 잊고 싶은 흑역사를 만들었던 기억은 내 추억을 풍성하게 했다. 나는 그렇게 3년 내내 웃고 떠들며 열심히 행복했다. 다른 사람은 어땠는지 몰라도 우리 학교는 나에게 좋은 학교였다. 그래서 요즘도 가끔 6학년 아이들이 '선생님은 어느 중학교 나오셨어요?'라고 물으면 '그게 뭐가 중요해. 어딜 가든 너 하기 나름이지.'라는 답을 한다.




 '나 하기 나름이다.'라는 말은 공간과 공동체를 대하는 나의 인식과 내가 어떤 것에 더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충분히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년 전쯤, 아이가 전학 갈 곳을 찾고 있는 학부모님께서 나에게 질문 하나를 한 적이 있다.


  "선생님, 어떤 학교가 좋나요?"


 나는 짧은 시간에 적절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나서 '아이가 안전하게 통학할 수 있고, 더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선생님들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곳이 아닐까요.'라며 누구나 할 법한 답변을 내놓았다. 지금에야 드는 생각이지만, 아마 학부모님께서는 정확한 학교명을 몇 개 추천받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같은 학교 안에 있어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옆반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 학생들 각자가 경험하는 학교는 모두 다를 텐데 어떤 학교가 좋은 학교인지 순위를 매기고 고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런 유형의 질문을 받을 때 당황스러운 이유는 학부모나 아이가 중점을 두고 있는 가치에 대해 나와 사전에 공유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학교라는 공간의 특성이 다른 공간과 다른 특수성을 띄기 때문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어떤 치과가 좋아요?'라고 묻는다면 친절함의 정도, 가격, 통원 거리, 주요 진료 과목, 의사의 숙련도 등의 기준으로 추천해줄 것이다. 하지만 학교는 조금 애매하다. 학교만큼 구성원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도 없다. 학교의 구성원은 병원과 다르게 유동적이다. 어떤 관리자가 부임해 오느냐에 따라 학교의 중점 사업이 변한다. 어떤 교사가 오고 가느냐에 따라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철학이 바뀐다. 어떤 아이들이 들어오고 나가느냐에 따라 교실 분위기, 학년 분위기가 바뀐다. 끊임없이 사람이 드나드는 학교의 특성상 학교는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공간이 된다. 사람들이 가르치러 가고 배우러 오는 공간이라서 그렇다. 


 그 해 어떤 사람들이 학교라는 공간을 구성하게 되는지는 차라리 운에 맡기는 편이 더 낫다는 말도 있다. 재밌는 건, 이 특별한 공간에서 굳이 사람이라는 중요한 변화 요소를 제거했을 때 남는 게 숫자라는 점이다. 그래서 학교의 실적이 그 학교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어있을 때가 많다. 학생들의 성취도 평가 점수가 몇 점인지, 서울대를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 민원이 몇 건이나 발생했는지가 좋은 학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어 버린 이유이다.




  어느새 나도 다른 학교로 근무지를 옮겨야 할 때가 되었다. 확실히 교사가 되고 나니 학교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다. 이는 학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확대되었다는 것과 동시에 좋은 학교의 요건에 대해 고려해야 할 요소가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학생일 때는 몰라도 관계없었던 것들 ―예를 들어 거기는 교장이 매우 사납다더라, 거기는 학부모 등쌀이 여간 심한 게 아니다더라, 거기는 학폭 사건이 너무 많이 발생한다더라 등의 이야기들―이 많이 생겼다. 물론 당연히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해도 당사자가 되면 여간 귀가 팔랑거리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면 다시 13살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우스워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안다. 좋은 학교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때문에 너무 겁먹지들 말자. 진부하고 식상한 얘기지만 김원준이 말한 것처럼 결국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경험상 좋다고 한 학교가 100퍼센트 맘에 들었던 것도 아니었고, 나쁘다고 한 학교가 100퍼센트 맘에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학교는 유동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일단 몸을 맡기고 좋은 관계들을 맺고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들을 찾으면 된다. 2019년, 학교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많은 선생님들(나 포함)과 학생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 


 201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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