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빠른거북 Dec 26. 2018

울보 선생님

학생보다 더 울어도 되나요?

나는 어렸을 적 눈물이 엄청 많았다고 한다.

가만히 있는 나를 누군가 안거나 나와 놀아주려고 손만 잡아도 금세 눈물을 흘리며 '으앙'하고 울었다고 한다.

(물론 내 기억엔 없다.)

심지어 엄마의 품이 아닌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의 품도 거절했으며 엄마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조차도 싫어해서 어렸을 적 오로지 늘 엄마 등허리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는 어렸을 적 나를 보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손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성장하면서도 나의 눈물샘은 줄어들 생각이 없었다.

성장하면서도 눈물샘의 크기는 비슷, 아니 어쩌면 더 커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책, TV, 드라마 심지어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도 눈물을 쏟을 만큼 눈물이 참 많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일단 눈물부터 차올랐고 차오른 눈물과 함께 하고 싶은 말을 뱉어내는 성격이었다.


화가 나는 일에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고 나 스스로 진정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면, 내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면 나는 어느덧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런 나의 개인적인 성향과 모습들이 간혹 교실 안에서 선생님스럽지 않게 보일까 봐 걱정이 될 때가 있다.

‘선생님이 애들처럼 막 울어도 되는가’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선생님.

개인적으로 이 단어의 온도는 따뜻하게 느껴지지만

이 단어가 따뜻한 메시지만을 제공하고 있진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단어가 나에게 말한다.


감정에 마구 흔들리지 말라고.

내 감정을 감추고 잘 컨트롤하라고.


물론 이건 내가 만들어낸, 느껴 온, 교사에 대한 '교사스러움' 일 것이다.



한 아이와 상담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아이 앞에서 울어버렸다.

1년간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교사 입장에서도 많은 시간과 마음을 투자한 아이였다.

버릇없어 보이는 행동과 예의 없는 태도가 학생의 귀여운 장난처럼 보일 정도로 아이한테 마음을 깊이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그저 '귀엽다', '괜찮다' 느껴진 건 아니었다.

아이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잘잘못을 이야기하고 혼도 냈으며 그 과정 속에 아이의 인정과 다짐도 받아냈고 가끔은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기도 했었다.


물론 내가 아무리 많은 마음을 줬더라도 그 아이가 알아차렸을지에는 나 역시도 장담할 수 없긴했다.



그 학생과 1년을 거의 다 보냈었을 즘 개인적인 나의 교직 생활에 있어서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 일을 겪었다.



4교시가 거의 끝날 무렵, 점심시간을 향하고 있었다.

 

아이가 나를 향해 소리 질렀다.

"선생님, 신고할 거예요."

소리 지르면서 울기 시작했다.

"아동학대로 신고할 거야. 선생님이 나 때렸잖아!"



그 순간, 정말 주위의 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다.

심심치 않게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통해 학교에서 아이를 체벌한 내용, 학대, 성희롱과 같은 눈살 찌푸려지는 일들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아이의 모든 대답들에 '안된다.'는 메시지만 전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수 없어요.'

'더 이상은 안 돼요.'

아이가 학대라고 느낄만한 말이었을까.


내 대답에 반응하는 아이의 언어는 충격적이었다. 마치 내가 그런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급식을 먹으러 가기 위해 복도에 줄을 서고 있는 또 다른 학생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교실 안에서 그 학생과 나만 그곳에 공기를 공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충격'과 '당황'스러움에 나 역시도 말했다.

"그래요. 그럼 신고하세요. 어떤 부분을 선생님이 학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신고하세요."



그 학생은 더욱 크게 울부짖으며 소리 질렀다.

" 112에 신고할 거야. 아빠한테 매 가지고 오라고 할 거야!"



무섭다라기보다는 충격적이었고 서운했다.

아니 사실은 서운하다는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밖에서 10분, 15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고 울부짖다가 숨을 헐떡 거리기 시작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내 감정에 집중할 겨를이 없었다.

그 당시엔 그냥 학생이 걱정되었다. 춥다고 했다. 못 일어나겠다고 했다.


나한테 폭언을 퍼붓던 아이를 앉혀 따뜻한 물을 건넸고 담요를 덮어줬다.

우리 반 애들은 여전히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급식조차 먹지 않겠다는 아이를 달래 급식실로 데리고 갔다.


사건이 정리된 것도, 감정을 추슬러 진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냥 다른 아이들의 급식 시간, 이 아이의 건강상태가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아이를 달래 급식실로 가면서 내 눈앞에 펼쳐진 배경이 눈에 들어올 때 즘 감정들이 콕. 박혀버렸다.

아이들을 인솔하면서 밥을 먹으면서 스스로 생각할, 잠시 '멍' 때릴 수 있는 시간이 오자 폭풍처럼 감정이 퍼붓어졌다.


억울했고 서운했다.

서러웠다.


아주 느지막이 급식실로 내려온 나를 발견한 동료 선생님이 내 표정을 보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아무 말하지 못하는 내게 말했다.

"무슨 일 있고만, 누구야 대체."

그냥 그 아이를 쳐다보는 것으로 내 대답은 끝이 났다.


아직 사건은 마무리되지 않았고 감정도 차분해지지 않았다.

급식시간 동안 아이는 벌써 진정된 듯해 보였다.


다시 한번 아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부분이 너를 학대했다고 느끼게 한 거니?"

그 아이 역시 아무 말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너에게 잘못한 부분이 무엇이니?"

역시 아무 말하지 않았다.


적막과 한숨 사이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성문이 쓰기 싫었어요."



그랬다.

계속되는 수업시간 자리 이탈.

수업시간 동안 다른 친구들을 향해 지우개의 모퉁이를 잘라 반복적으로 던졌던 일.

친구의 싫다는 경고를 무시한 일.

저 멀리 앉아 있는 친구의 필통을 낚아채 친구들과 주고받기를 한 일.

모두 수업시간에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 학생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만 잘못된 행동에 대한 반성은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반성하고 싶지 않은 아이에게 반성의 종류로 제시한 '반성문(=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 행동이 왜 잘못된 행동인지, 앞으로의 다짐은 무엇인지)'이 이 아이의 마음에 쏙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학대한 교사, 신고당할 뻔 한 교사가 되었다.


아이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생각과 마음들,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의 시간 동안 내 눈물은 계속 쏟아져 나왔고 그 눈물은 멈출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 난 아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흘렸다기보다 펑펑 울었다.



나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과 날 선 언어를 내지르던 아이는 내 눈물을 보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점차 눈빛이 온순해졌다.


나에게 신고하겠다고 소리 질렀던 학생이,

울고불고 소리 지르던 학생이 잠잠해진 건 아이를 향해 하나하나 설명하던 내가 결국 눈물을 쏟아내면서였다.



필자의 부모님은 말한다.

너 그렇게 눈물이 많아서 애들 앞에서도 우는 거 아이냐고.


이 말에 나는 넉살 좋게 웃으며 말한다

"이미 많이 울었어."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게 사실은 부끄럽다. 친구들 앞에서, 가족들 앞에서 감정을 훤히 내보이며 우는 것도 부끄러운데

나의 가르침을 받고, 나에게 의지하는 아이들 앞에서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울고 있다는 사실에 '어른 아이'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 아이보다 내가 더 우는 것 같아서..



그런데

이런 내 모습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감정에 충실하되 울면서 하나하나 설명하고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들.

이런 나에게도 성숙한 어른 아이가 찾아오길 기대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특수학급에서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