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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Jan 28. 2019

휴직은 선택이 아닌 필수

  12월 24일에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방학을 하자마자 밤새 짐을 싸고 청소를 하였다. 학교 근처의 집을 정리하고 시골 본가에 들어와 지냈다. 종종 학교에 가서 삼 년 동안 산 교구와 도서를 정리하였다. 다음 선생님이 쓸 것과 아닐 것들을 헤아리면서 어지간한 것들은 추려냈다. 종업할 때 학생들에게 줄 것과 교실에 남겨둬야 할 것들을 구분해두었다. 내 것과 학교 것을 다시 확인하고 짐을 꾸려놓았다. 처음으로 연수가 없는 방학을 보냈다. 이사하고 몸살 앓고 학교 정리하고 출국할 준비를 하였더니 이틀 후면 개학이다. 내일, 학생들이 없을 때 짐을 마저 챙겨오면 숨이 돌려지려나.    


  봄. 새봄이 오면 生의 휴식기를 갖는다. 학생들이 하루에 6교시 수업이 있으면 60분 이상의 쉬는 시간을 갖는다. 나는 내 속도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안다. 일주일에 한 시간, 한 달에 하루, 1년에 일주일만이라도 오롯하게 쉴 수 있다면 일상이 그리 숨차지 않을 것 같다. 평균수명을 80세로 보면, 절반은 살았으니 내 생의 철길을 멈추고 잠깐 쉬어도 좋다. 멈춘 역에서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다른 경험도 하고 다른 생각도 하고 다른 꿈도 꾸면서 해찰을 하고 와도, 그러고 다시 철길 위에 서도 충분하다.     


  한국의 교사는 다른 직종보다 휴직이 잘 보장되어 있다. 휴직이 승인되려면 엄격한 세부 기준이 있지만,  개인이 아플 때 질병 휴직, 가족이 아플 때 간병 휴직, 동반자가 해외에 일하면 동반 휴직, 자녀가 있으면 육아 휴직을 할 수 있고, 내가 가장 쏠쏠하게 여기는 ‘연수 휴직’이 있다. 해외 연수 휴직 중 유학 휴직은 학위 취득과 어학연수 두 가지가 있다. 중등의 경우 어학 관련 교과 전공이어야 해당 언어권 국가로 어학연수를 갈 수 있지만, 유치원과 초등의 경우 학부 전공과 달라도 영어권 국가이기만 하면 갈 수 있다. 전 영역, 전 교과를 가르치므로 당연한 원칙인 거 같지만, 교사가 어학연수를 가서 어학만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역사・언어・문화・일상에서 만나는 사람・경험・사고의 틀을 깨는 시간임을 고려한다면 복직해서 학생들에게 주는 직・간접 영향을 고려하여 급별과 전공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교사에게 기회가 보장되는 게 자연하다. 내가 속한 시도의 교육청에서는 교사가 평생에 어학연수를 한 번에 1년씩 총 두 번을 휴직하고 갈 수 있다. 한번 갔다 오면 5년 이내에는 허용이 안 된다. 물론 어학비와 거주비용은 개인 부담이다.    


  나는 특수교육학부로 입학하고 2학년 때 유아, 초등, 중등으로 급별을 나누어 특수교육을 전공하는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학기마다 1주일씩 특수학교로 참관실습을 하러 갔다. 1학년 1학기 때 처음으로 시각장애 특수학교에 갔다.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의 덩치를 보고 그들의 화장실 신변처리를 지도할 자신이 없어서 초등 특수교육으로 맘을 굳혔다. 초등학생 중에서 발달이 더딘 학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유아 특수교육을 복수전공을 했다.


  막상 학교에 근무하면서는 ‘특수교사는 모두 다 천사’라는 오명을 없애고 싶었고, 학생을 안전하게 돌보는 데에만 국한하는 학습지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특수교사로서 특수교육 대상학생들의 부당한 대우를 대변하고 교육권을 보장받기 위해 현재의 부족함을 포착해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발언을 해야 했다. ‘교장실을 나가면 입 열고 살지 말라’는 교장 선생님도 만났고, 내가 ‘일제 강점기에 살았더라면 물고문을 당하더라도 입은 물 위에 나오자마자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을 거’라는 선생님도 만났고, 새 학교에서 학생을 보조하는 동료가 본인보다 어린 나를 쉽게 보아서 3~4월 내내 두세 시간만 자고 8명 학생(특수학급 정원은 6명)의 수업 준비를 한 적도 있었다.     


  특수교육의 길은 섬세하고 민감하며 느리다. 학생들이 여전한 ‘문제 행동’, 그냥저냥 변화가 없어 보이더라도 어느 날부터는 내 눈을 바라보기도 하고, 만난 지 3년 만에 선생님이라고 불러주기도 하고, 화장실을 스스로 가기도 한다. 그 순간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억하는 일상에 시간을 더해보니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신체 접촉을 질색으로 여기던 내가 학생들과 악수하고, 기쁨의 포옹을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다. 학창시절에는 활달하고 외향적이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홀로의 시간에 갈증을 느끼고 조용한 게 좋다.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단정하고 확신하는 어투를 지양하게 되었다. 작은 것에 울고 웃기도 하고 소소한 것으로도 사람들에게 감동하고 상처받기도 한다. 남들이 지나치는 그깟 쯤이 나에게는 큰 문제가 되어 술을 찾기도 하고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인간관계에 피로를 느끼기도 한다.


  교사라면 학생, 학부모, 관리자와 동료, 행정가와 주로 관계 맺지만 특수교사는 학생과 가족을 둘러싼 학생의 통합학급 담임교사, 지역사회복지사, 치료사, 의료전문가 등과 밀접하게 소통한다. 밤 10시 반에 집에 엄마가 없다고 울며 집에 와달라고 전화하는 학생도 있고, 장애가 있거나 심리적인 지원이 필요한 보호자에게 상담과 양육 정보를 지원하거나 서비스를 연계하기도 한다. 치료사, 방과후 교사들과 학생의 출석이나 활동을 공유한다. 진행성 근위축증이 있는 학생이 음식을 삼키는 게 어려워 자꾸 게워내면 영양교사의 배려로 죽을 마련하기도 한다. 뇌전증이 있어 약을 복용 중인 학생이 학교 생활이 어려울 만큼 쏟아지는 잠을 자면 의사와 상담을 한다. 교사에게뿐만 아니라 학교폭력 신고전화도 잦은 학생이 있다면 지역사회 경찰과도 협업한다. 보호자가 자녀를 방임하거나 학대하면 아동보호전문기관을 찾는다. 특수교육 범주에 근접한 학생에 대한 담임교사의 의뢰는 보호자에게는 서운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학생의 교육적 요구를 고려할 때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사안이다. 때로는 사제 관계만큼 보호자와도 밀접하고 오랜 관계를 이어가기도 한다. 방학이나 퇴근 후에도 자녀와 싸우다가 힘들면 전화해서 자녀에게 지도 설명을 요청하기도 하고, 졸업한 학생이 고교 진학이나 전공과(고교 졸업 후 2년제 직업교육과정) 진학 상담을 두드리기도 한다. 한 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특수학급에서 학생을 계속 담당하기 때문에, 새학년이 되면 담임교사에게 학생의 정보와 통합을 지원하면서 부모스런 마음일 때도 있고, 학부모의 민원과 담임교사와의 갈등을 중재하다보면 담임스런 마음일 때도 있다.


  학생한테 계단에서 맞고 머리 뜯기고, 다른 학생의 성추행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특수교사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길이 아니란 걸 절감하였다. 그때 ‘다문화 가정’의 자녀 중에 특수교육 대상으로 선정된 학생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고 배우고 있던 한국어교육이, 특수교육 말고 걸어갈 수 있는 보험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막상 외교통상부 산하, 코이카에서 해외봉사단 선발 공고를 보았을 때 한국어교육보다 특수교육으로 두드리고 싶었다. 어쩌면 한국어교육을 시작하기보다 특수교육의 마침표를 잘 찍을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은근함도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장애가 있어 특별한 교육적 지원이 필요한 학생들을 만나고 현지 선생님들과 필요한 것들을 일구어내면서, 전 세계 소통이 가능한 분야로서의 특수교육에 매력을 느꼈다. 인류애를 느끼며 같이 울기도 했고, 좀 더 배우고 싶고 좀 더 잘하고 싶은 도전의식과 귀한 자리에서 귀한 쓰임이 되는 성취감도 느꼈다.


  영미권 그림책과 도서를 서로 읽고 감동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으나 영어 공용 국가로서 현지 동료들이 나보다 더 영어 문서를 잘 찾아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보편적 교육 수준이 일상에 온전히 녹지 못하는 그들만의 한계도 있었다. 한국의 특수교사로서 내가 가진 나의 한계, 나만의 천동설도 당연히 있다는 두려운 인식이 시작되었다. 내 경험, 내 공부, 내 가치가 옳다는 생각과 늘 깨어 있으며 실천하려고 노력해온 그 시간에서의 실수가 떠올랐다. 내가 내 틀을 깰 수 있는 것, 그 기회는 내가 태어나 모국어로 말하고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한국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외국어로 말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과 시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다양한 문화, 다양한 역사, 다양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조화롭게 지내는 곳이면 더욱더 좋겠다. 그래서 나는 새봄이 오기 전에 하늘을 날아 캐나다에 간다.     

서울시청 앞 이정표, 내 눈엔 평양과 오타와만 보인다. Hello, Ottawa?   :-)

  시골집은 논으로 둘러싸인 동네이다. 파란 하늘을 유영하듯이, 자연의 섭리 같은 배열을 자유롭게 지키며 청둥오리 떼가 내 머리 위를 날아간다. 고개를 들어 그들의 날갯짓을 바라보면 가슴이 뛴다. 이제껏 배우고 싶은 것과 실천하는 것의 균형점을 찾고 싶은 내 선택이었다. 오롯한 길을 걷기보다 이것저것에 기웃거려야만 숨이 쉬어지는 게 내 걸음이고 방향이다. B612호에 살던 어린왕자가 여러 별과 지구를 여행하고 장미에게 돌아가듯이, 나도 새로운 경험과 만남과 느낌을 소중히 여기고 배우고 깊어져서 돌아오고 싶다. 그때의 내 모습이 지금의 기대에 못 미쳐도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마주할 수 있기를 다독이며 믿어보련다.


즐겨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내 안부가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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