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든 뉴질랜드이든 사는 곳에 관계없이 나와 비슷한 연배의 지인들 대화는 종합병원을 방문한 환자와 의사 간 대화를 많이 닮아있다. 모두가 아프고 모두가 고도의 의학상식을 탑재하여 서로를 치유하고 예방한다. 살아있는 자들의 회진이 끝나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떠날 위기에 처한 지인들의 안부로 화제는 전환되고, 사람을 바꿔 만나도 앞서의 이야기에 새로운 의학상식과 새로운 지인의 안부가 무한히 덧대어져 오가는 대화를 꽉 채운다. 이야기의 막바지에 불현듯 투척하는 손주들의 사진과 동영상은 내게는 다른 희망이 자라고 있음을 즉, 나의 시대는 완벽하게 저물었음의 반증에 다름 아니고.
그렇다. 나이가 들어가니 멀쩡하던 부위가 갑자기 아픈 것 같고 엊그제까지 평안하던 지인의 부고소식을 듣는 일도 많아진다. 이러다 큰 병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지인의 부고도 곧 내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온 정신을 지배한다.
젊은 시절,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그 나이에 나는 어느새 와있고 그 시절 그 나이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지나온 생을 정리당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마주하고 있다.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의 25% 에 도달하면 초고령화 사회라고 하는데 일본은 이미 30%에 육박하고 있고 대한민국도 조만간 25%에 도달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야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뉴스에서는 걱정스러운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고령층이 공공재정 악화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고령인구의 직업활동이 사회악처럼 비치기도 한다.
고령화 사회가 불가역적으로 이미 도래하였는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인양 세상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고령층의 피지컬이 예전과 달리 예사롭지 않은데 세상은 아직도 그들이 뒷방에서 쉬어야 할 힘없는 노인으로 본다. 몸은 2024년을 살면서 인식은 7-80년대 산업화사회시대에서 질척거리는 그 인지부조화가 놀라울 뿐이다.
고령층은 이미 인구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아직 사지멀쩡한 그들이 산업활동에서 밀려나는 한 인지부조화의 갭을 메꾸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고령층을 다시 산업활동에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뒷받침이 필수일 터 현재 한국의 경우에는 2020년부터 고령자 계속 고용장려금이라는 지원정책이 수립되었고 올해에는 지원기간이 2년에서 3년으로 연장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용주의 결단에 의거한 지원정책이 아니라 정년의 폐지등 당연정책으로 바뀌어야만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할 것이니(뉴질랜드는 정년퇴직이 없다) 정책당국의 주도하에 사회적 합의가 빨리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현재의 인구구조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는 만성적 인력난에 허덕이는 산업계에서도 원하는 바일 터이니 해결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희망도 가져보지만…..
이미 산업활동에서 이탈되어 변화될 정책의 수혜자가 되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에서 해법을 제시해 보자면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OpenAI의 chatGPT 가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chatGPT는 인류가 축적해 온 지성의 결과물을 거대언어모델(LLM) 방식에 의거 채팅하듯 자연어로 문답할 수 있는 인공지능 서비스이다. 특히 지난 1월 11일에는 GPT Store 가 오픈되어 어느 누구라도 독자적인 data 가 있다면 LLM을 기반으로 개인적인 학습을 통해 대중에게 인공지능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GPT Store는 앱스토어와 비슷하지만 프로그래밍이 필요 없이 자연어 만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평소 덕질에 투철했던 분이라면 오랜 세월 덕질로 축적한 data를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으며 당연히 그에 따른 수익도 OpenAI에서 받을 수 있다.
젊은 세대에 비해 콘텐츠가 많을 수밖에 없는 연륜, 힘든 육체노동이 버거울 수 있는 나이 그리고 프로그래밍이라는 허들이 없는 개발방식을 종합해 보면 이만한 일거리가 또 있을까 싶다. 투자금은 월에 단돈 20불이다.
피에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여 주저되신다면 직업의 수명보다 인간의 수명이 더 길어진 시대임을, AI는 이미 우리 생활에 총체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음을 인지하시라.
사람들은 철도의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사고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치밀하고 합리적인 계산이 강조되었으며 낡고 ‘부정확한’ 습관들이 더는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실제로 19세기말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은 어떤 민족이 과연 근대를 살아가기에 유전적으로 ‘적합한지’를 결정할 때 철도를 건설해서 운영하고, 이를 이용할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일반적인 기준으로 사용했다.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 케네스 포메란츠, 스티븐 토픽] P 164-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