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회색 안갯속 운전대만 꽉 잡고
어느새 성장보다는
'#갓생러'가
목표가 된 것이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나에게 온 모든 기회를 성공을 위한 기회라 생각하며 눈을 희번덕할 때가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성공을 위한 기회’라고 여기는 순간, 그 과정은 그리 즐겁지 않다.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하는 여정은 언제나 힘이 빠진다. ‘성공’이라는 결과가 디폴트가 돼버리는 순간 성공하지 않으면 잃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성공이라는 목적지로 향하며 느끼는 압박감과 조급함은 나를 예민하고 난폭한 드라이버로 만들어버린다.
이제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 불안, 기대는 휘휘 날려버리고 지금 당장 최선을 다하는 것에 집중한다. 대다수가 향하는 같은 여정의 길보다 운전자인 나의 목소리를 잘 들어주고 쉴 때 쉬어주고 당장 눈앞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지금을 충만하게 사는 것, 이것이 나에겐 ‘성공’의 여정이다.
언젠가부턴가 성공에 대한 찬사와 외침의 썸네일들만이 그득해진 유튜브와 인스타를 발견하고는 질려버려 폰을 저 멀리 치워버린 적이 있다. 무기력함은 무조건 극복해야 하는 것이며, 어느 게으른 하루를 보낸 나에게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아주 그냥 무자비한 저주를 퍼붓기 일쑤다.
최근 요 몇 년간은 특히 본업 외에 수익을 내야 하는 것이 똑똑한 삶이며 컴퓨터 앞에 앉아서 돈을 버는 영 앤 리치가 당연한 세상이라고 장담한다. 나에게 그런 자기 계발 콘텐츠들은 아주 가끔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연료가 되기도 하지만, 방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백수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저런 메시지들은 나를 더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20대 초중반, 한때 자기 계발 서적에 푹 빠진 적이 있다. 동네에 있는 단골 Barnes and Noble 서점에 가서 늘 Self-help / Self-improvement 섹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베스트셀러 책을 뒤적대거나, 혹은 두세 배의 빠른 정보 습득을 위해 휴스턴 코리안 타운 언저리에 위치한 ‘고려 서점’에 가서 한국 소비자가의 두세 배의 비싼 가격을 더 얹어주면서까지 열심히 구매한 기억이 있다.
자기 계발서만 거진 백 권 정도 읽다 보니 내용이 다 거기서 거기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라, 감사해라, 노력해라, 하면 된다,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 등… 지금도 마찬가지로 비유법과 언어의 톤만 다를 뿐 10년 전의 이야기들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자기 계발에 미친 갓생러의 삶은 아주 대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전에 세운 목표는 어느새 잊어버리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잘 살기 위한 뿌듯함만을 위한 시간을 보낸다. ‘미라클 모닝’을 한답시고 새벽 4-5시에 일어나 명상을 하고 글을 쓰는 나 자신에 심취한 적이 있다. 어느새 성장보다는 '#갓생러'가 목표가 된 것이다.
1분 1초를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매 순간을 배움이나 건강을 위해 피곤하고 불편해도 꾹꾹 참으며 이것 또한 나를 위한 투자라 믿으며 ‘멋있어 보이기 위한’ 하루를 살았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끌끌 혀를 찰 때도 있었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답을 만들어 하나의 프레임에 자발적으로 기어 들어가 좁디좁은 시야로 이 세상을 정의 내렸던 나였다.
성공의 경로가 그려진 수십수백 장의 지도를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따라가기를 15년. 결국 남들이 내려준 삶의 답은 허망함을 남기고 끝을 냈다. 10년 넘게 지속해 온 그 치열함 덕분에 이제는 더 이상 남들이 그려준 여정에는 큰 관심이 없다. 단지 나의 경로를 찾아가기 위한 지침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뿐.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방바닥에 펼쳐진 눈앞의 수많은 지도를 한동안 빤히 바라봤다. 각각의 지도에 그려진 길들을 보니 어느 지도에도 출발지와 도착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곤 나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의 여정의 끝이 과연 ‘성공’이 맞는가.' '‘성공’의 정의는 무엇인가.' '내가 가는 길이 ‘성공’이 아니라는 법은 없는가.' '나는 왜 이렇게 '성공'에 집착하는가.' '나는 대체 무엇이 두려운가.'
그렇게 나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경로에 의구심을 품고 슬슬 이탈을 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