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경로를 안내하겠습니다.”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주는 과거의 기억은
내가 직접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인스타그램의 수많은 기능 중에 스토리를 가장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그 기능을 '투명한 다이어리'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라고 건네는 질문은 금세 무색해지며 "아 맞다, 너 스토리 보니까 바쁘게 잘 지내더라." 하며 공개 일기장 역할을 톡톡히 한다.
'기록용'으로 아주 아주 잘 활용하고 있는 내 개인 계정용 인스타 스토리는 어찌 보면 나와 많이 닮았다:
- 24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삭제된다는 것.
- 삭제한 기억을 굳이 굳이 더듬고 싶다면 떠올릴 수는 있다는 것.('보관' 메뉴 찬스 쓰기)
일상에서 쉬이 보이는 나의 대표적인 습관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인스타 스토리에 남기기, 또 하나는 밥 먹기 전에 음식 사진 찍기이다.
쟁반 위 찬밥에 조미김만 놓여있어도 사진을 찍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엄마는 늘 나를 이해 안 가는 눈으로 쳐다본다.
과거에 대한 기억력이 썩 좋지 않은 나는 사실 당장 어제 점심에 뭘 먹었는지도 기억을 잘 못한다.(혹시 '디지털 치매'가 떠오르는가..?) 식사는 그래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하니까.
사진 앱에 남겨진 음식 사진을 보면 그때 뭘 했고 어딜 갔고 누구랑 있었는지 등등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스토리에 올릴 거 아니면 공들여 찍지도 않는다. 그냥 자동으로 손이 음식 위로 올라가 항공샷을 톡 하고 찍고 밥을 먹는다. 간식이나 주전부리도 찍는다. 생각해 보니 입에 들어가는 모든 걸 찍는 것 같다.
단순 기억을 위한 단순 기록. 이런 습관을 가진 지 한 8년 가까이 된 것 같다.
기존 경로에서 새로운 경로로 틀게 한 나의 애티튜드 중 하나는, 더 이상 지나간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나에게 '데이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마치 찬밥에 조미김을 먹은 날처럼 그저 내가 '무엇을 했구나' 하는 정도이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는 데이터라면 곧바로 인스타 스토리나 아이폰 메모 앱에 남겨지고 나머지는 자동 삭제된다.
가끔 감정적으로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 '이건 내 기억에 씨게 남을 것 같다' 하는 경험들 역시 아이폰 메모 앱에 바로 적는데, 이럴 땐 목적이 달라진다. 그건 바로 감정 해소.
해소를 위한 글을 쓸 때는 10년 넘게 행하는 나만의 룰이 있다. 그건 바로 주어와 목적어를 빼는 것이다.
나에게 영향을 미친 대상에 대한 정보나 어떤 말이 오갔는지 등의 팩트나열은 금하고, 그저 내가 그 상황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만 집중해서 적는다.
이 방법은 나에게는 굉장히 효과적이다.
쓰는 당시에는 나의 감정에만 집중해서 우다다다 적다 보니 어느 정도 쌓일 뻔한 감정이 해소가 돼서 좋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그 글을 볼 때 그 일에 대해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는 요소가 없으니 2차 트라우마를 막을 수가 있어서 좋다. (가끔은 그런 감정을 일으킨 대상이 누군지 궁금해서 한참 기억을 더듬다가 포기한 적도 많다.)
한때의 일을 굳이 굳이 떠올리자면 떠올려볼 수는 있지만 되도록이면 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 계속해서 곱씹어볼 만한 영양가 있는 기억이 아니라면, 지난 일들을 그저 '좋았던 일, ' '썩 좋지 않았던 일.' 이렇게 느낌적인 느낌으로 두루뭉술하게 남겨둔다.(사실 이것조차 잊어버린다.)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늘 변한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르다.
해서 나는 '과거의 나'보다는 '현재의 나'에게 집중하는 편이다.
가끔 과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이 "야, 너 기억 안 나? 우리 그때 거기 가서 엄청 재밌게 놀았잖아!" 하며 서운함을 내비칠 때가 있다. 여기까지는 나도 머쓱하게 미안해하며 한 번쯤은 손잡고 추억여행을 함께 떠나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땐 진짜 뭣도 모르고 행복했는데. 아~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말을 들으면 붙잡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 나는 단 한 번도 과거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현재의 불만족을 반영한 비현실적인 소망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대한 회한과 미련의 표현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단지 좋았던 과거에 대해서 자꾸 '습관적으로' 기억을 떠올린다면, 과거에 비해 더 좋은 일이 있지 않는 이상 현재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지 않은가. (특히나 과거는 미화되기 일쑤다!)
반대로 지난 과거에 있었던 충격적인 경험이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어 현재의 나를 정의 내리기도 한다. "나는 예전에 이런 상처를 받았으니까 우울한 게 당연한 거야." "00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등등.
'현재의 나'는 당연히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건 부정할 수 없으며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에게도 '과거의 나'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본인이 변화를 원한다는 전제하에.)
최근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금비 씨는 삶의 최종목표가 뭐예요?"
짧은 침묵이 흐르고 나의 답은 "없어요."였다.
없다.
내 삶의 '최종 목표'라는 건 더 이상 두지 않게 됐다. 어제의 내가 열심히 세운 목표가 오늘의 내가 세운 목표와 같지 않을 수 있어 '최종 목표'라는 것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물론 '목표 설정'은 내가 실행을 하는데에 있어서 매우 큰 동기부여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과거에 세운 목표가 현재 내가 봤을 때도 동일한가?'와 같은 질문을 주기적으로 하며 '현재의 나'의 생각을 자주 들어준다면 '목표'는 삶에 있어서 아주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변화는 당연한 거니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 혹은 '사람의 마음은 갈대 같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줏대 없이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사람의 생각은 수백 수천번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고, 나의 변화도 기꺼이 받아주자는 말이다.
가끔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틀에 갇혀 뚝딱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최근 몇 년간, 그리고 여전히 유행 중인 MBTI가 그러하다. 이전엔 사람을 혈액형으로 4가지로 나누더니, 이제는 16가지로 나누어 가둬두기 딱 좋은 도구다.
F가 T처럼 행동하면 상대가 서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맥락, 상황, 함께 있는 대상에 따라서 매 순간 변할 수 있다. 왜냐면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5초마다 나를 자극하는 숏폼을 통해서도 계속해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계속 "성장"을 하던 "도태"가 되던 어쨌든 변한다.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주는 과거의 기억은 내가 직접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에 그저 벌어져버린 일들이 나를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어차피 우리의 대부분의 기억들은 왜곡되어 있다.
심지어 불과 몇 초 전에 발생한 일에 대해서도 내적편견에 의해 기억을 왜곡한다고 하지 않는가. ('단기 기억 착시 현상' - 마르테 오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
이왕 왜곡할 거 나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경험이 오더라도 하나의 '교훈'으로, 긍정적이 경험이 온다면 '감사한 복'으로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