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팔에 새긴 레터링 타투가 티셔츠에 온전히 가려지지 않아 반팔 티셔츠 기준으로 팔을 가린 아래부터 글귀의 반 정도가 보이는데 가끔 뜻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면 한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고 웃으며 말하거나 대충 착하게 살자는 뜻이다라고 말하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분위기를 풍기며 대답을 간결하게 끝내면 내 대답이 시원치 않아서인지 단순히 던진 질문일 뿐이었는지 금방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바뀌는 걸 보곤 한다.
내가 새긴 타투의 의미는 라틴어로 'Noli timere sacrificare' 뜻은 우리말로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원래 타투에 관심도 없었거니와 타투를 한 사람에 대해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놀만큼 놀았나 보다는 편견이 들어 몸에 문신을 한 모습이 좋게 보이진 않았다. 매체에서 타투를 한 연예인들을 볼 때도 특별히 멋있다거나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고 한 번 새기면 잘 지워지지도 않는 타투를 왜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그런 내가 정말 어느 날 갑자기 타투를 새기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되었고, 마음먹은 것은 바로 실천하는 편이기에 그때부터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디자인으로 할지 열심히 검색을 하며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귀여운 디자인으로 하는 미니 타투보다 이왕 하는 거 의미 있는 레터링으로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런데 레터링을 하기로 마음먹으니 이번엔 어떤 문구를 새길 것인지가 최대 고민이 되었다.
특별히 의미 있거나 기억에 남는 명언도 없어 네이버에 레터링 문구를 폭풍 검색을 하다 보니 몇 가지 마음에 드는 후보가 나왔다.
amor fait(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Carpe diem(현재를 즐겨라)
Hakuna matata(문제없다)
이 세 가지 문구가 우선은 가장 맘에 들었고 이 중 어떤 걸로 선택할지 고민에 빠져있을 때, 평생 내 몸에 새기게 될 낙인이기도 하고 세 가지 의미 모두 너무 좋은 뜻인데도 이상하게 이거다! 하고 확신이 드는 것이 없어 고민만 하고 있을 때 문득 어째서 세 가지 문구 모두 나를 사로잡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나는 남들이 볼 시선도 고려해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온전히 나에게만 의미 있는 문구여야 되는데 누군가에겐 인생 글귀가 될 수 도 있는 좋은 명언 들이지만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 팩트였다.
그때 내 시야에 아무렇게나 세워둔 책들 사이에서 두꺼운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책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이'(권터 발라프 지음)라는 책으로 나는 이 책을 가장 힘들었던 20대 어느 날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려 읽게 되었고, 책의 내용에 신선한 충격을 받아 무조건 소장해야 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서점으로 가 딱 한 권 남아 있는 책을 바로 구매할 수 있었다. 지금은 절판이 되어 중고로 구매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때도 꽤 큰 서점임에도 불구하고 한 권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초조하게 서점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제일 구석 칸에 여러 책들 사이에 끼어 있는 책을 겨우 꺼냈을 때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책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한 독일인 기자의 다큐멘터리 형식의 실화를 바탕으로 기자가 직접 겪은 내용을 책으로 옮겼으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외국인 용역 노동의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권터 발라프는 직접 외국인 노동자로 잠입하여 제대로 된 처우도 받지 못한 채 낯선 환경에서 부당하게 일하고 있는 그들의 처참한 실상을 직접 체험하며 글로써 세상에 알린다. 나는 어떤 책을 읽고 가치관이 변하거나 마음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들이 받는 비인격적인 대우에 분노했고, 그럼에도 열심히 인내하며 인생을 개척해가려 하는 그들의 모습은 당시 심적으로 힘든 날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삶에 뛰어든 기자의 희생정신이 매우 존경스러웠다.
그 뒤로부터 이 책은 나의 인생 책이 되었고, 매 년 한 번씩 꼭 정독을 하고 있다. 그런데 500페이지가 넘다 보니 읽을 때마다 새로운 내용처럼 보인 다는 것은 비밀이다.
그렇게 나는 레터링 문구를 이 책이 의미하는 바와 관련이 있으면서도 나의 인생에서 잊을 때마다 한 번 씩 되새기고 싶은 나만의 다짐이 들어간 문구를 새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Noli timere sacrificare'라는 문장으로 탄생했다.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 말 뜻을 생각하기 전 나는 남에게 희생하는 것에 대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첫째로 태어난 순간부터 나에게 양보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인간관계에서도 늘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고, 원래 타고난 성격이기도 해서 사실 손해를 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이 지치고 힘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동생에게 양보하는 것도 짜증이 나고 나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먼저 배려하는 것에도 지쳐 누구보다도 나를 먼저 생각하기로 결심했고, 그러다 보니 손해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계산적으로 사람을 대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내가 양보하고 배려하면 상대방도 한 번은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기브 앤 테이크를 모토로 삼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약속 시간에 항상 늦게 오는 친구가 있었는데 늘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는 나는 어느 순간 항상 나를 기다리게 하는 친구가 이기적으로 느껴졌고, 그날도 역시 약속 장소에 도착하려면 20분이나 더 있어야 한다는 친구의 문자에 나는 그대로 집으로 가버린 적이 있었다. 또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항상 소파 자리나 편한 자리는 맡아 논 것처럼 매번 본인이 앉는 친구도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친구와 밥을 먹고 카페에 갔을 때 '넌 맨날 소파 자리만 앉더라. 바꿔서 좀 앉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친구는 전혀 못 느꼈다는 듯이 '내가 그랬었나?'라고 반응했고 말을 내뱉은 나만 예민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얄미웠지만 나름 속은 시원했다. 그 뒤로도 남에게 먼저 희생하지 않겠다는 나의 생각은 한동안 변함이 없었다.
그런 내가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자'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몸과 마음이 지친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고 보니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 얽혀 있어 내가 한 상대방을 위해 배려하면 그 상대방이 아닌 전혀 뜻밖의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기기도 하며, 하나를 내어주면 다른 곳에서 생각지 못하게 다시 하나가 돌아온다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면 시간이 지나더라도 내가 상처 주었던 방법 그대로 누군가에게 돌려받기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먼저 나서서 희생하고 배려하는 것을 더 이상손해 보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기꺼이 먼저 나서서 희생하리라 하는 다짐을 늘 새기며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이 담긴 타투다 보니 단순히 무슨 뜻이냐 하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참 난감해 그냥.. 착하게 살 자랑 비슷해요. 하고 어색하게 웃어넘기게 되었다. 그 편이 나도 편하고 말이다.
헌데 타투를 새긴 지 벌써 6년째 접어들었지만 어쩐지 아직도 이기적인 마음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마음속으로는 늘 되새기고 있지만 어째 넓은 마음으로 사람을 포용하기도 쉽지가 않고 조그만 일에도 발끈하는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한 참 먼 것만 같다.
내가 도를 닦는 행자도 아니고, 마더 테레사 수녀님처럼 헌신하고 봉사하는 깊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진 못하겠지만 희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인류애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안다.
사람을 사랑하자. 나도 단점이 많은 사람이다. 모든 사람은 좋은 면이 있다.라고 속으로 늘 생각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