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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ji Sep 03. 2016

축하합니다, 노산이시네요

1. 임신 첫 확인-한국 편 

맙소사.. 임신 테스트기의 선명한 두 줄을 확인하고는 '멘붕' 상태에 빠졌다. 순간의 방심이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37살로 적지 않은 나이지만 주변엔 결혼을 안 한 친구도, 또 결혼은 했지만 아기는 없는 지인도 많았다.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결혼을 하고 뒤이어 자녀를 낳는, 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고, 우리 부부는 어찌할지 차차 생각해보려던 터였다.   


충격 속에 두 줄을 확인한 게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바로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8시 반으로 산부인과 진료를 예약했다. 인터넷으로 이렇게 신속하게 병원 예약이 가능하다니, 역시 효율성과 신속성의 왕국, 대한민국이라고 감탄하면서. 집에서 멀지 않은, 난임 치료와 산부인과 진료로 유명한 ㅊ 병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수십 명의 배 나온 임산부들과 나란히 앉아 접수를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결혼하던 날이 떠올랐다. 마치 처녀 귀신들이 떼로 등장한 것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십 명의 신부들이 나란히 거울 앞에 앉아 메이크업을 받던, 내 인생 가장 기괴했던 풍경. 그때 결혼 공장의 컨테이너 벨트 위에 서있었듯 이젠 출산 공정이 시작된 건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노산이시네요" 


의사는 초음파 사진 속 조그만 까만 점 같은 걸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35살 지나 아기를 낳으니 노산이라 고위험 임산부에 포함된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잘 관리하면 된다고, 뭔 말인지도 모를 '태아 프로그래밍'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으며, 10분 간의 짧은 진료는 끝이 났다. 다음 진료는 2주 뒤,  아기집이 잘 자리 잡나 다시 초음파 사진을 찍자고 말했다. 그땐 몰랐다. 앞으로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고, 그때마다 명세서에 찍히는 진료비와 검사비를 보면서 '돈 없는 사람은 애 낳겠냐!' 분통을 터뜨리게 될 것이라는 걸. 그리고 '노산'이라는 말이 현실에선 추가 검사와 그에 따르는 엄청난 추가 비용을 의미한다는 것을.


일단 이 날은 처방받은 임산부용 비타민제를 손에 들고 멍한 기분으로 회사로 가는 택시에 올라탔다.  


자, 이제 어쩌지..


임신 사실을 주변에 일찍 알리고 싶진 않았다. 초기엔 잘못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는데(게다가 노산이라는데!), 괜히 일찍 말했다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내 정신도 아직 수습하지 못했는데, 결과적으로 어떤 상황에 내몰릴지 모르는, '임산부로서의 커밍아웃'을 감행한다는 것도 두려웠다. 원치 않는 부서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6개월까지 임신 사실을 숨겼다는 둥 임신*출산과 관련된 회사 선배들의 온갖 경험담들도 떠올랐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달에 두세 번 밤을 꼬박 새우며 일하는 야근 당번이 돌아오는데, 몸 상태가 야근을 견딜 수 없었다. 며칠 뒤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렸고 대부분 진심 어린, 때로는 명목상의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긴 했지만, 내가 기존만큼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리는 과정이 그렇게 마음 편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자들은 결혼하고, 특히 출산하고 나면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들었었는데, 이제 그런 전투력 떨어지는 여기자로 분류되는 것인가, 분하고 복잡한 마음도 들었다.


돌이켜보면 임신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하신 분은 시어머니셨던 것 같다.  거의 울듯한 목소리로 '너희 이제 효도는 다했다'면서 요즘 그렇게 듣기 힘들다는, '원하면 키워주겠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그동안 손주에 대해선 말씀 한마디 없으셨는데, 아들보다 나이도 더 많은 며느리에게 말도 못 꺼내시고 혼자 마음 졸이신 건가, 죄송하고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임신 첫 확인, 한동안 번민과 혼돈의 시간이 찾아왔지만, 정말 진심이 느껴지는 축하 인사를 받을 때마다, '그래, 괜찮을 수도 있겠다' 조금은 안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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