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과 한 겨울이 무섭다.
온몸이 뜨거워서 귀가 붉게 익어간다. 여름에는 땀이 부족한 체질이 아니었음을 등판이 촉촉해지는 면 티셔츠가 알려주고 멍 해지는 정신을 아이스커피로 부여잡는다. 서울 한복판에 살 때에는 잘 모르지만 나무와 하천이 많은 경기도로 이사 오면서 겨울을 체감하게 된다. 살 떨리는 바람과 낮은 기온은 몸이 아니라 마음의 온기를 다 뺏어간다.
한여름과 한겨울은 외부 활동량이 줄어드니 시간이 더디고 무겁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한겨울은 특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걸음이 겸손해진다. 따뜻한 방에서 손바닥에 꽉 차는 큰 귤을 조물 거 린다. 발에는 두꺼운 털실로 짜인 양말을 신고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서 차갑고 달달하고 새콤한 귤 맛을 입안 가득 누린다. 이런저런 영상을 보면서 긴 저녁 시간을 홀라당 까먹는다. 낮의 해가 너무 강렬하게 떠 있어도 해가 너무 짧게 떠 있어도 적당히 따뜻한 시간이 아쉽다.
한 여름에는 모닝빵이나 치아바타를 만들기 좋다. 겨울처럼 이불 안에 빵 반죽을 넣어놓고 들추면서 기다리지 않아도 쑤욱 잘 부풀어 오르니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든다. 2차 발효까지 마친 반죽을 오븐에 넣으면 잠시의 설렘이 기다린다. 어떻게 구워질까? 모양이 제대로 나올까? 태워먹지 않을까? 시간을 재면서 기다린다.
빵을 만드는 시간
커피를 내리는 시간
책을 읽는 시간
이 시간들은 배고프고 허전한 나의 시간을 채워준다. 그리고 누군가의 수고들이 있음을 가끔 생각한다. 커피원두가 내 손에 온전히 오기까지 원두의 열매를 맺는 농부와 유통과 로스팅의 과정 수많은 손길들. 책 한 줄의 의미를 연필로 건져 올리는 기쁨을 누리는 데에는 글쓴이의 수고와 출판을 해준 사람들이 애쓴 시간이 담겨있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나의 시간은 어디에 담겨있을까?
길 고양이는 오늘도 배고프다. 한 여름의 소나기에도 길고양이에게 밥은 줘야 한다. 몇 해 전 처음 만났을 때 육아에 바쁜 어미 고양이가 있었다. 내가 제일 마음을 많이 쏟은 녀석이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이유였고 길에 사는 전혀 사람손을 타지 않은 야생 동물과 감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존재였다. 녀석은 밥을 찾아서 동네 곳곳을 누비고 다녔고 언젠가부터는 나를 기다렸다. 저벅거리는 나의 발자국 소리를 알고 있었다. 어두움 속에서도 내 실루엣을 안다는 듯이 불쑥 차 밑에서 나타났다. 문득 나타났던 날은 분리수거를 할 때였다. 큰 포대자루 옆에서 스르륵 나타나서 안전거리를 긋고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아파트 놀이터 옆이었다. 밝은 시간이었는데 상태를 보니 털이 한 움쿵 뜯겨있었다. 항시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던 포악하고 덩치 큰 깡패 고양이가 있었는데 그 녀석이 범인이었을지 아니면 고만고만한 녀석들 간의 싸움이 있었던 것인지 건강의 문제였는지 모르지만 배가 많이 고픈 상태였다. 당시에는 동네 고양이들이 중성화 수술이 되지 않은 때였다. 나는 이제 막 길 고양이들이 눈에 들어오던 때였다. 그 녀석이 상처 입고 밥을 허겁지겁 먹는 것을 다만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거리를 두고 쳐다보는 것조차 다른 사람들의 눈길이 나로 인해 그 녀석에게 닿을까 봐 바로 돌아섰다.
나도 한 때, 한 움큼씩 털이 빠졌던 시간들이 있었다. 시간에 쫓기며 살 때에는 이 시간에 노력한 만큼 내 속을 갈아 넣은 만큼, 좋지 않은 머리로 공부한 만큼, 회사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내 속이 시끄러운 만큼 성장할 줄 알았다. 모든 시간이 지나면 공들인 시간만큼의 자리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나의 그 시간들이 자리를 남겨놓지 않음을 깨달았다.
한 여름의 뜨거움과 몰아치는 칼바람을 이겨낸 어미 고양이는 나에게 끝까지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당연히 버텨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기 바로 직전에 세찬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비를 맞으며 숨을 거둔 녀석의 몸은 아직 따뜻했다. 정이 많은 아랫집 아주머니가 내어준 화단에 묻었다. 꽁꽁 얼었던 땅은 세찬 봄 비에 이제 막 단단함을 풀 때였다.
길고양이들은 그랬다. 겨울을 간절히 이겨내길 바랐지만 봄이 되면 그 생명을 하늘로 옮겨갔다. 살아주길 바라며 몸 서리 치는 추위에 콧물을 닦아가며 밥을 먹인 시간이 사라졌다.
나에게도 그 녀석들에게도 궁금하다. 그래서 내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 어디에 남아있을까?
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
-우리는 이미 따스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쏟아지는 비와 눈을 맞으며 길 위의 작은 친구, 길고양이를 만나러 갑니다. 내가 주는 이 한 끼가 이 녀석들 삶에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밥을 줍니다. 눈물이 더 많아진 너와의 만남이지만 추운 날 신발이 없이 날 만나러 온 너와 오늘도 깊은 교감을 쌓아갑니다. 남들은 이해 목하는 우리의 소중한 우정.-
책의 뒤표지에 쓰인 글을 읽고 눈물이 나는 것을 겨우 참았습니다. 나에게 쓴 글 같아서 주책맞게 감동받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따스함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보신 적 있을까요? 고양이의 흰 발은 참으로 귀엽습니다. 오므리고 앉아있는 가지런한 발은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순간의 유혹에 날카로운 발톱을 잊으면 큰일이 납니다.
한겨울, 밥집 근처에 총총히 남겨진 발자국들을 보면서 아직 그들이 살아있음에 안도합니다. 그 계절이 곧 올 텐데 한 여름을 지나고 있지만 생각만 해도 한파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들고 가는 도시락을 기다리며 펑펑 내리는 눈에 푹푹 빠지면서도 달려오던 녀석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친구들은 신발이 없거든요. 눈길을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 내 발이 다 동동거려집니다. 나는 털부츠를 신고도 매년 발가락 끝에 동창이 걸리니까요.
*책_공존을 위한 길고양이 안내서_북폴리오_이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