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가 독일에 온 건 8월이었다. 생후 9개월이 갓 넘었을 때였다. 나는 1달 전 먼저 독일에 들어와서 식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베를린 여름은 평균 기온이 25도를 넘지 않는다. 시원한 여름이다. 한국에서 40도 가까운 더위에 지쳐있던 아이와 아내 그리고 우리 독일 정착을 도와주러 오신 장모님은 시원한 여름에 만족해하셨다. 그리고 외출을 할 땐 아이에게 가디건과 양말, 조끼를 입히고 얇은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한국 보다 선선한 날씨에 아이가 감기가 걸리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밖에 나가기만 하면 채 20분도 되지 않아 짜증을 내고 울었다.
새로운 세상이 낯설기 때문인지, 밖에 나오기 싫은 것인지 이유야 어쨌든 뭔가 바깥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운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잠도 잘 잤고, 밥도 잘 먹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외출만 하면 운다는 걸 사실 이해하기 어려웠다.
9월 하순 어느 날. 바깥 온도는 18~19도였다. 나와 아내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나왔다. 역시나 아이는 조끼, 가디건, 양말, 이불을 겹겹이 싸매고 나왔다. 그러나 밖에서 만난 다른 독일 아이들은 반팔, 반팔 티를 입고 유모차에 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아내는 "아이가 우는 것이 혹시 더워서 짜증이 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독일 아이와 달리 우리 아이만 너무 덥게 입고 있었기 때문. 실제로 10여분 걷자니 등에서 땀이 났다.
‘내가 이렇게 더운데 아이는 덥지 않을까.’
아이도 더울 것이다. 유모차를 세우고 이불을 걷었다. 양말도 벗겼다. 조끼도 벗겼다. 내복 차림으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했다. 그놈의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 따위는 집어치웠다. 좋은 햇살이었고 바람은 선선했다.
“우리가 더우니 아이도 더울 거야. 주위를 봐봐. 독일 아이들 누구도 우리 아이처럼 싸매고 다니지 않잖아. 아이가 보내는 신호를 믿자.”
아내도 동의했다.
아내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동네를 걸었다. 우리 둘이 대화에 빠진 사이 10여분이 흘렀다. 아이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했다. 독일에 와서 산책을 하는 동안 처음 겪는 일이었다. 왜 이렇게 조용한가 싶어 아이를 봤더니 자고 있었다.
앉은 자세에서 양 손으로 안전 바를 잡고 있던 아이는 머리를 왼손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울지도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고시 공부를 하다 자기도 모르게 지쳐서 책상에 기대어 자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아. 아이가 원한 것은 시원한 복장이었구나.’
그랬다. 아이는 그런 선선한 바람이 부는 환경을 원했고 시원한 옷차림을 원했던 것이다. 유모차에 앉으면 가뜩이나 등이 덥고, 기저귀를 차서 엉덩이도 뜨거운데 양말에 조끼에 이불까지 덮었으니 얼마나 짜증이 났을까. 아이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육아에 대해 한 가지 더 깨달았다.
그 후론 외출을 할 때마다 항상 복장에 신경을 쓴다.
‘우리가 가볍게 입을 땐 아이도 가볍게, 우리가 따뜻하게 입을 땐 아이도 딱 그 정도만 따뜻하게’라는 원칙을 세웠다.
그 원칙대로 하고 나니 아이는 유모차만 타면 잔다. 잠투정 한 번도 없이 잔다. 앉은 채로 잘 잔다. 바깥 날씨가 1도일 때도 잔다. 아이들은 시원한 날씨를 좋아한다(물론 우리 아이만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예외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2017년 9월 베를린에서 어느 날 아이의 옷을 가볍게 입히기로 결단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우리의 산책과 외출은 스트레스 덩어리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