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독일 수도 베를린 쇤네베르크 프란켄슈트라세에서 한 남자 아이가 인도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아직 돌이 지나지 않아 보이는 아이였다. 아내와 함께 아들을 태운 유모차를 끌고 가던 나는 그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더러운 길바닥을 아이가 기어 다닐 수 있을까. 도대체 부모는 어떤 사람들이지.’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지난 36년간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애완견이 지나다니며 길에 오줌을 싸기도 했고(비록 비에 씻겨 내려가지만) 담뱃재와 각종 쓰레기들도 떨어져 있었다.
주변을 살폈다. 1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빈 유모차 손잡이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은 허리에 올린 30대 여성이 보였다. 친구로 보이는 다른 독일 여성과 대화하고 있었다. 분명 아이의 엄마다. 그는 아이가 잘 있는지 한 번씩 눈길을 보냈지만 기어 다니는 아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아마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가다 친구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곤 아이가 답답해하자 길에 내려놨을 것이다.
‘아이를 이런 식으로 방치해도 될까.’
그 순간 익숙하지 않은 또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걷던 사람들과 식당 노천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던 독일인들 그 누구도 이들 모자를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것.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들을 유심히 바라본 사람들은 나와 아내뿐이었다.
‘만약 한국에서 누군가 아이를 길바닥에 기어 다니게 놔뒀다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마치 옥상에서 물 한 바가지를 정수리에 쏟아 부은 것처럼 갖가지 의문이 뇌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모차 안에서 답답해하며 우는 아이를 그대로 놔두는 게 좋았을까 아니면 손과 옷이 조금 더러워지더라도 마음껏 기어 다니면서 아이가 웃게 만드는 게 좋았을까. 오랜 만에 만난 친구에게 ‘아이가 우니까 빨리 가봐야 해’라고 말하곤 헤어지는 게 좋았을까 아니면 기어 다니게 두고 친구와 회포를 푸는 게 좋았을까. 육아를 위해 친구와 대화하는 것마저 포기하는 엄마가 과연 행복할까 아니면 그 반대가 바람직한 것일까. 도대체 우리 육아는 어떤 육아이고 저들의 육아는 어떤 육아일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도 우리 아이가 원한다면 밖에서도 기어 다니게 했다. 사실 그리 대범하지 못하고 여전히 소심한 한국 부모라서 길바닥에서 아이를 기어 다니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놀이터 흙 밭에서 굴러다니는 아이들 틈에서 놀게 했고 마트, 편의점, 옷가게, 백화점, 안경집, 식당 등 실내에서는 어디든 아이가 유모차에 있는 걸 지루해한다 싶으면 아이를 풀어놨다. 그때마다 가게 주인들에게 물었다.
“아이를 놀게 해도 괜찮은가요?”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에게도 괜찮고 우리에게도 괜찮아요.” 그들은 아이들이 가게 바닥에서 기어 다니는 걸 행복한 눈으로 바라봤고 성가시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 아이는 밖에 나갈 때마다 기어 다니며 놀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기 때문에 매우 만족해했다. 사실 부모 입장에선 아이가 혼자 열심히 놀 때가 가장 편한 순간이기도 하다.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가장 즐거운 방법을 찾은 것이다.
독일 아이들이 길에서 기어 다니는 모습을 봤을 때 ‘저게 뭐야. 애들을 저렇게 더럽게 키워’라고 생각하지 않고 ‘독일 애들은 길에서 기어 다니는데도 건강하게 잘 크는구나. 우리 애도 그렇게 키워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행동에 옮긴 것은 지금도 훌륭한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한국에서는 누리지 못할 자유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아이들을 풀어놔도 좋을 것 같다. 물론 한국의 식당, 백화점, 가게 주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나도 섣불리 예측하기는 어렵지만.(뭐 우리가 대부분 예상하는 그 반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