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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리 Mar 14. 2019

싫은 책

<식객>


1.

이 책이 싫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렇습니다.


2.

정보는 지나치게 많고 전달하는 방식은 매끄럽지가 못합니다. 식재료 a를 소개한다고 치면, a가 가장 유명한 지역에 대한 소개를 7컷 정도, a가 언급된 고려 혹은 조선 문헌에 대해 꽉 찬 말풍선 7개 정도, a를 잘 먹는 방법에 대해 우다다 지면 가득 2페이지 정도 할애합니다. 스토리를 잘 버무려서 만화적인 재미와 함께 정보를 풀어낸 에피소드도 분명 있지만, 20권이 넘는 전집에서 체감 상 그런 에피소드는 1%도 안 됩니다. 대부분 주조연의 입을 빌려서 "어느어느 책에서 이 식재료는 언제부터 먹었다고 적혀 있다. 특히 어디어디에 효능이 좋고 어느어느 시점에 먹는 것이 최고이다." 라는 말을 이 말투 그대로 전합니다. 재미가 없어요. 만화를 보는 게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기분.   


3.

작가가 '기록'으로서의 작품 의도를 밝힌 바 있으니 이런 감상이 어느 정도 당연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꾸 웹툰 <오무라이스 잼잼>이 떠오릅니다. 두 작품은 꽤 공통점이 많아요. 1) 음식 혹은 식재료를 소재로 하고 2) 에피소드 형식의 만화이고 3) 다양한 정보를 한 에피소드에 농축시킨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물론 차이점도 많지요. <오무라이스 잼잼>은 한식 뿐 아니라 유럽, 북미, 남미 등 다양한 지역의 음식을 다루고, 일상을 소재로 음식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에서 일상-생활툰의 성격을 띤다는 것 등등.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오무라이스 잼잼>은 재미있다는 겁니다.


4.

하나 예시를 들어봅시다. <오무라이스 잼잼>의 223화는 우리나라의 쌈 문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작가 가족만의 방법에 대해 말하면서 '쌈 얘기'에 대한 운을 먼저 띄웁니다. 쌈 문화에 대해 칭찬한 중국인 친구의 코멘트가 이어지더니, 중국 문헌에 소개된 고려의 쌈에 대해서도 말해줍니다. 이렇게 잠깐 과거로 넘어가는 듯 하더니 은근슬쩍 다시 현대로 넘어와서는, 아시아나 기내식에 출현한 쌈, 깻잎쌈 양배추쌈 무쌈 등등 현대의 다양한 쌈 싸먹는 그림을 보여주고, 급기야 우주정거장에서 수확한 첫 작물이 상추였다는 탈지구적 정보까지 알려주네요. 한 에피소드에 1) 역사 2) 먹는 방법 3) 현대의 모습 4) 앞으로의 미래 까지 이런 저렁 정보를 꽉꽉 넣어 담았습니다. 그렇지만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한 컷당 텍스트의 비중이 적당하고 정보 간에 개연성이 있으며 정보 자체가 흥미로운 것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야죠. 만화라면! 만화라면 이런 재미가 있어야죠! 내가 취재한 정보를 우다다 뽐낼 게 아니라 다듬고 찌고 채썰어서 내놔야죠!


5.

 <식객>이 싫은 두번째 이유는 이른바 특유의 '꼰대적'인 태도 때문입니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먹냐, 매력적으로 먹어야지!" 성차별. "니네들이 먹는 햄버거가 음식이냐! 청국장 먹어봐. 헤이 츄라이 츄라이!" 식문화 차별. "요즘 것들은 단맛에 길들여져서 원재료의 맛을 모르는구먼!" 이건...이건 뭐죠? 조미료 차별? 세대 차별? 물론 저 큰따옴표들은 원문에서 rephrasing한 것들이지만, 뉘앙스는 그대로입니다. 어쩜 그렇게 못마땅한 것도 많고 가르치고 싶은 것도 많으신지.


6.

물론 작품을 절대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건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이 만화가 만들어졌던 사회적 배경과 시대를 고려해야 하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심청이>도 문화적 배경과 창작 시기를 싹 걷어내고 본다면 그냥 인신매매가 되버리니까요. 하지만 그런 뒷배경까지 고려하는 노력에는 어느 수준 이상의 작품성이 보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전 이 작품을 변호하거나 가치를 올려주기 위해서, 아 <식객>이 만들어졌을 땐 우리나라 국수주의가 좀 심했으니까 햄버거 피자 먹는다고 디스할 수 있지, 지금만큼 성차별에 민감하지 않았으니까 아내는 남편과 아이를 같이 키우는 존재이다~정도의 속담은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지, 백종원이 방송에 안 나왔을 때니까 설탕 쓴다고 난리난리 6.25 때 난리 할 수 있지, 등등의 생각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러려면 제가 <식객>에서 재미를 찾아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7.

논문이나 보고서 등 무언가의 레퍼런스로서는 기능할 수 있는 책일 것 같습니다만, 만화책으로서 추천하거나 만화책으로서 즐길 수 있는 책은 저에게 아니었습니다. 뭐 위에 길게 쓴 이유는 사실 변명이고, 여자에 외국 음식을 좋아하고 단맛에 환장하는 사람이라 이 책이 못마땅했던 건지도 몰라요. 방금 얘기한 세 가지 특징 중 하나라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다가 유쾌하지 못 할 순간은 별로 없을 것 같네요.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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