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을 나는 새>
얼빠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얼빠는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빠'돌이 OR 순이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스포츠 팬덤에서는 이 단어를 꽤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선수의 실력은 보지 않고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팬들을 비하할 때요. 이렇듯 얼빠는 대상의 속내(?)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외모에 집중해 덕질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저는 펭귄을 좋아합니다. 미취학아동시절부터 점토 물고기 먹방을 보여주는 핑구에 빠진 이후로 펭귄 종에 대한 애정은 무럭무럭 커졌고, 급기야 펭귄 굿즈는 종류별로 모조리 탕탕탕 모아서 그걸 또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한 적도 있었죠. 펭귄 워터볼, 펭귄 북커버, 펭귄 파우치, 펭귄 줄감개, 아무튼 펭귄 실물 빼고 구할 수 있는 펭귄템은 어떻게든 사서 그렇게 열심히 덕질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물 속을 나는 새>를 읽고 깨달았죠. 나는 지금까지 펭귄 얼빠였다는 것을
이 책은 남극 세종기지에서 몇 년 째 펭귄을 관찰한 이원영 씨가 쓴 펭귄 관찰일지(?) 생태일지(?) 뭐 둘 중에 하나거나 둘 사이에 있는 무언가입니다. 총 20개의 챕터, 그보다 더 많은 펭귄 사진들(덕잘알 작가가 분명),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펭귄에 대한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펭귄의 최대 잠수 깊이가 무려 500미터를 넘어간다든지, 잠수를 할 때에는 심장이 1분에 3회 꼴로 뛴다든지, 젠투펭귄은 아무거나 잘 먹는 친구인 반면에 턱끈펭귄은 난 한놈만 패라면서 남극크릴만 조진다든지 같은 일상생활에 매우 유익하고 트렌디한 대화에 적용할 수 있는 정보들이 가득하죠. 이 정보들은 따로 메모해두고 리뷰를 쓸 때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들입니다. 그만큼 다채로운 정보를 쉽게 체화할 수 있도록 서술되어 있어서, 약 200여쪽에 이르는 분량이지만 두시간만에 후루룩짭짭할 수 있습니다.
아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가보자면 제가 펭귄 얼빠라는 걸 깨달은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 난 정말 펭귄의 귀여움말고는 쥐뿔 아는 게 없었구나를 절절히 느꼈기 때문입니다. 젠투펭귄 턱끈펭귄 아델리펭귄 황제펭귄 구별할 줄만 알았지, 이 친구들 북극 가면 잘 살 수 있나? 사람은 알아보나?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나? 등등 그들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던 것이어요. (이 책에는 방금 말한 질문들에 대한 답이 모조리 있습니다)
사실 얼빠는 비하의 대상이 될 게 못됩니다. 외모로 1차 덕질 추동이 걸리고 거기에서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것이 계기가 되어 덕질 대상의 면면을 다 파헤쳐버려야 만족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죠. 사실 지금도 펭귄에 대해 저는 전자에 더 가깝습니다. 펭귄 영화나 펭귄 다큐멘터리가 나온다면 거기에 나온 펭귄들을 시각적으로 보고 싶어서 가는 것이지 그들의 생태를 보고 싶어 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물 속을 나는 새>는 제가 좋아하는 펭귄을 더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래서 고마운 책입니다. 그러니까 만화로 치면 설정집같은 느낌이죠. 데스노트 12권까지 다 읽는 걸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설정집으로 나온 13권까지 읽어야 덕질이 완성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물 속을 나는 새>를 읽는 건 그거랑 비슷한 느낌입니다.
아 물론 재밌기도 했고요.
아 펭귄 직찍이 많아서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아 이것은 좋은 책입니다. 펭덕들이여 이 책을 적극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