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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Dec 09. 2023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














이젠,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 

저물어 가는 모든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때, 

이미 가을은 저물었고 한해도 저물어 가며 딱 그만큼 나도 저물어 간다. 

기실 저뭄 없는 존재란 없다. 

다만 시선이란 것이 매우 상대적이어서 청춘 때는 청춘도 잘 모르지만 저뭄을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저물었기 때문에 저뭄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욕심은 손톱 초승달만큼이나 적어지고 마음은 하현달만큼이나 침착해지지만

그 시선은 깊고 투명해서 낡아지고 소멸하며 사라지는 것들에 자주 머무른다. 

위화의 책 서문에서 동정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운 기억이 있다.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고상하다. 나는 내가 고상한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 <인생>의 주인공 푸구이는 한 마리 소를 데리고 일하며 여러 소의 이름을 부른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소도 여럿이 함께 일하는 것 같으면 힘이 덜 들 거라고 대답한다. 

同情은 우월한 상태에서 낮은 사람에게 보내는 감정이 아니다. 

같은 마음, 같은 정을 갖는다는 뜻이다.

고상 역시 공존이나 이타에서 맴도는 향기라는 것,

 

자주 걷는 산책길에 프라타너스가 많다. 

올핸 유별나게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눈에 띄었다. 

어른 손바닥보다 더 큰 나뭇잎들이 수두룩하게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platanus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의 'platys'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데 

넓다라는 뜻으로 이파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며칠 전 해 질 무렵 산책을 나갔다. 

저물어 가던 해가 옆으로 길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프라타너스 잎들이 그 빛에 자신의 몸을 올올이 드러냈다. 

순간 그 흔하디흔한 이파리들이 생경할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땅에 뒹굴고 있는 이파리 하나를 주워들고 가만히 살펴보았다. 

낙엽이나 단풍이라는 짧은 단어로 삭칠 일이 아니었다.

갈색? 아니었다. 

갈색처럼 보이는 그 색 속에 이름도 모르는 무수한 색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자연스러운 색의 향연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색만이 아니었다. 

잎몸의 생김새가 얼마나 조화로운지, 리아스식 해안가는 저리가라였다. 

살짝살짝 휘면서 구르다가 날카로운 끝이 되고 어느 곳에서는 깊게 패어 들어왔다. 

절묘한 선과 그 선들을 이루어 가는 잎몸. 

이파리 뒤를 보니 선명하게 나타나는 잎맥들,

굵고 가느다랗고 짧기도 길기도 하면서 어느 곳은 넓고 어느 곳은 좁게, 

마치 여름날 아침 이슬 담뿍 머금은 섬세한 거미줄처럼 섬세하게 펼쳐져 있다. 

잎맥은 물과 양분의 이동 통로로 물관과 체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런 기능적인 면은 차치하고라도 

마치 적요한 산길처럼 그들만의 세상을 고요하게 이뤄가고 있었다. 

잎자루의 밑을 보니 자루보다 더 통통한, 

그러니까 가지를 단단하게 감싸고 있던 자리가 선명하다. 

그 구멍이 제법 크다. 

한때 잎을 매달고 서서 자라게 하고 무르익게 하며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던 작은 구멍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렇다.

아직 단 한 번도 시들어가는 낙엽을 정중하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지는 잎이라 하여, 

선명한 색이 아니라 하여 그저 밟고 다니기만 했을 뿐이다. 

저리 속 깊은 아름다움이, 

생명을 이어주던 존재와 기억의 잔재가 

저리도 선명하게 내재하여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 

플라타너스는 우리말로 양버즘나무다. 

목피의 껍질이 얼룩덜룩한 채 벗어지니 버짐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기정화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증산작용이 놀라워서 도시의 열섬현상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물기가 많은 땅이나 건조한 도시, 

더러운 곳이나 산성화된 토양에서도 뿌리를 잘 내린다. 

켜켜이 쌓인 크고 수많은 잎들로 시원한 그늘을 지어낸다. 

사람들은 어떤가. 

주변의 전선을 훼손시키고 상가의 간판을 가린다고, 잘라 내버린다. 

가로수 낙엽 처리가 머리 아프다며 얼마나 세게 가지치기를 했는지 

몸통만 덩그렇게 서 있는 예도 있다. 

하두 잘 자라고 잎도 무성해서 전기선이나 신호등, 교통표지판도 가려지곤 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의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고’ 

훨훨 옷벗은 플라타너스를 보며 백석의 절창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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