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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rang May 11. 2023

그때, 그곳의, 그들(그그그)

나의 20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몇 살 때로 가면 좋을까?  마흔을 넘기니 가끔 혼자 멍하니 드는 생각 중 하나이며, 누군가와 대화 중 어색함을 태울 때 던지는  불쏘시개 같은 질문 중 하나다. 나는 십 대는 엄두도 안 나 제쳐두고 이십 대, 삼십 대를 고민하다 서른 한두살쯤으로 결정한다. 이유를 말하다 보면 이십 대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도 덧붙히게 된다. 서른 초반으로 가고 싶은 이유는 뭘 쫌 알 나이라서 새로운 도전을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선택했지만 이십 대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때만큼 더 행복할 자신이 없어서다. 나의 이십 대는 웃는 날이 많았다.      


여전히 대장부스러운 진희의 연락에 한 달 뒤 토요일로 시간을 맞췄다. 대여섯 명 정도 모이는데 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다. 가슴이 뛰었다. 어린 자녀를 둔 변수 많은 집안 사정으로 설레발은 금지, 살랑이는 마음을 붙잡고 차분히 그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만나러 간다. 나의 함께 웃던 이십 대의 인연들. 이렇게 모이는 일도 거의 십 년만인 듯하다. 버스는 무정차 구간을 지나 시내로 들어섰다. 달라졌지만 익숙한 모습의 거리, 새로 지어진 못 보던 건물들이 기억을 훼방 놓지만 다 떠오른다. 그 오래전 모습이. 시골스러웠던 곳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시내는 오히려 옛 모습을 그대로다. 도착지 정거장 안내방송이 나오자마자 하차벨을 눌렀다. 약속장소는 지하철이 있는 큰 사거리 건너편이다. 괜히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보며 한번 웃어도 보고 옷매무새를 고쳐봤다.    

  

일행은 치킨집 안쪽의 창가에 모여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 멀리서부터 양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나도 옛 모습 그대로 란다. 검은 머리에 숨어있는 수많은 새치며, 10kg 가까이 불어난 몸무게, 깊어진 주름은 명백한 사실인데도. 예전 그대로라는 내 말에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SNS나 가끔씩 바뀌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는 것으로 안부를 물어서일까, 그래서 변해가는 모습이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서로의 시간이 마지막 순간에 멈추지 않고 문득 생각나는 그 순간에 나만큼 그들도, 그들만큼 나도 같은 보폭으로 흘러가는 서로를 발견했는지도, 그리하여 어쩌면 우리는 계속 만나고 있었는지도.      

고등학교 졸업 후 다니던 몇 곳의 공장과 회사를 거쳐 스물두 살에 안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고 싶은 공부 좀 해보겠다는 이유로 친구 집에 빌붙어 살았다. 낮에는 학원, 저녁에는 식당으로 공부와 일을 하며 일 년을 보냈고 이듬해 취업을 했다. 그쯤 예수님도 모를 정도로 조용히 다니던 성당, 성가대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먼저 물으며 청년회와 인연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십 대 대개의 일요일 저녁은 성당에서 보냈다. 그 세월 동안 수없이 스쳐 간 인연들 중 오래 머문 몇 안 되는 인연들. 우리들은 만나기만 하면 웃었다. 웃겨서 웃고, 힘들었다가도 웃고, 슬펐다가도 웃고, 아팠다가도 웃었다. 그들은 날 학사마로 불렀다. 학은 내 이름에서 따오고, 사마는 드라마 겨울연가로 유명해진 배용준을 부르는 일본식 호칭인 욘사마에서 따왔다. 왜 학사마가 됐는지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아마 어딘가 닮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약속하지 않은 약속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웃었다. 월급을 못 받던 시절에도, 카드값을 메꾸려 야간 편의점 일까지 하던 시절에도, 사람을 못 믿어 취업을 꺼리던 시절에도, 뒤늦게 학교를 다니며 일하랴 공부하랴 쉴 틈 없던 시절에도 매주 만나 웃었다. 그러고 보니 가장 젊었지만 미래가 없던, 가장 힘이 셌지만 가장 힘이 들던 , 먼저 떠난 부모를 원망하며 보호를 갈망하던 그 시절에 나는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훨씬 많았다. 청춘을 소비하는 쾌락의 웃음이 아닌 애써 괜찮은 척하는 가식의 웃음이 아닌 내 존재를 밝혀주던 빛나는 그 웃음들. 가장 불행해야 했을 이십 대가 제일 행복했던 행운의 시절이었다.    

만약 그때 다른 도시로 갔더라면, 조용히 성당만 다녔더라면, 패기와 오해가 넘치는 또래 무리에 섞이지 못했더라면 나의 20대는 어찌 됐을까. 꾸역꾸역 살아는 갔겠지만 정서적 풍요조차 느끼지 못한 채 원망과 좌절의 시절이 됐을지도. 갈 수만 있다면 되돌아가 모조리 바꾸고 싶은 이십  대가 됐을지도. 그래서 난 그때, 그곳의, 그들이 고맙다. 함께 달려준 그들이 소중하다. 바람이 있다면 그들도 함께 나눈 웃음이 나의 의미와 조금이라도 겹치길, 그들의 이십 대도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는 시절이었길, 거기에 내 존재가 작은 보탬이 됐길 바라본다. 그리고 하나 더 바람이 있다면 이들이, 이곳에서, 이 순간 그 시절  못지않은 어여쁜 시간 조각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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