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그리고 나의 이별 이야기
이것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얼마 전, 지독한 이별을 겪었다. 아니, 사실 이별이라고 하기 뭐하다. 이미 일 년 반 전에 헤어진 사람과 다시 연락을 하고, 다시 만난다 뭐다 난리를 쳤으니. 하지만 이제 와서야 나는 제대로 된 이별을 했다.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상대방의 태도였다. 시답잖은 이야기로 나에게 먼저 연락하고, 남들 다 있는 곳에서 나의 안부를 대신 전하고, 오랜 통화 끝에 끝내 나에게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라고 하던 그. 왜 그렇게 애매한 태도를 취했을까. 자신의 마음이 흔들려서였을까, 이제와 자신을 붙잡는 나를 향한 복수였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별을 겪은 뒤 나는 통상 이별을 겪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나에겐 상황별 영화 리스트가 있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볼 영화를 선택한다. 예를 들어, 기분이 너무 좋아 더 행복해지고 싶은 날에는 <어바웃 타임>을 보고 너무 슬퍼 혼자 울고 싶어 지는 날에는 <인사이드 아웃>이나 <안녕, 헤이즐>을 본다. 그리고 지독한 이별을 겪은 그때에는 <500일의 썸머>를 보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와 참 많이 닮았다. 아니, 통상적으로 보자면 <500일의 썸머>는 우리 모두의 사랑 이야기이자 이별 이야기이다. 톰이 썸머를 보며 첫 눈에 반하는 장면에서, 둘이 함께 IKEA에서 부부 놀이를 하는 장면에서, 나는 우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내가 썸머이고 그가 톰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관계에서 변덕스럽고 짜증을 부리던 건 나였기에.
그리고 이 영화를 다시 본 지금, 나는 깨달았다. 마지막에는, 내가 톰이고 그가 썸머였다고.
첫 번째, 우리는 분명히 끝이 났음에도 그는 나와의 연락을 끊지 않았다.
두 번째, 그는 나에게 나로 인해 "여자"를 다시 만나기 무서워졌다고 했지만, 누군가와 썸을 타고 있었다.
세 번째, 나와의 첫 번째 통화에서 그는 울었고 마지막 통화에서 그는 웃었다.
<500일의 썸머>는 톰의 입장에서 쓴 영화이다. 아무리 톰과 썸머에게 각자의 입장이 있다고 할 지라도 어쨌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이별에서 피해자가 된 경험을 되살려 이 영화를 본다. 그리고 저 이유에 따라 나 역시 우리 이별의 피해자였다.
첫 번째, 썸머는 톰에게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 사이에 그 어떤 "label"도 붙이고 싶지 않다고. 지금 이대로가 좋지 않냐고. 그러면서 그에게 누구에도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만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I guess I'm not just anybody."라고 톰은 느낀다. 그 또한 그랬다. 통화를 하는 동안 우리는 마치 일 년 반 전으로 돌아간 듯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너만 힘들지 않다면, 계속 이렇게 연락해도 괜찮아."
두 번째, 썸머는 약혼반지를 한 상태로 톰 앞에 나타난다. 심지어 일부러 기다렸다. 이 벤치에서는 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사랑을 믿지 않던 그녀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운명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And... I just kept thinking... Tom was right." 그와 연락을 하던 중, 친한 동생이 나에게 조심스레 연락을 해왔다. 그가 나에게는 완전히 마음이 떠났고,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면서. 며칠 전 나로 인해 받은 상처 때문에 다시는 사랑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더니, 그는 보란 듯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세 번째, 썸머와 톰의 마지막 대화에서 그들의 표정이 사뭇 다르다. 썸머는 내내 웃고 있고 톰은 일관된 표정을 유지한다. 사랑은 마지막에 더 사랑한 사람이 이긴 거라고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보며 다시금 생각했다. 사랑은 뒤끝이 깔끔한 사랑이 이기는 거라고. 썸머는 완전히 행복으로 가득 찬 새로운 사랑을 만났고 톰은 여전히 작게나마 썸머를 사랑하고 있었다. 우리 또한 그랬겠지. 마지막 통화에서 그는 웃었고 나는 울었다.
Nice to meet you. I'm Autumn.
이 대사로 <500일의 썸머>는 끝이 난다. 짧고도 강력한 한 줄이다. 톰에게도 'Autumn'이라는 새로운 계절이자 사랑이 찾아왔다. 어쩌면 '500 Days of Autumn'이라는 또 다른 톰의 비루한 사랑 이야기가 시작될 지도 모르지만, 그 누가 아는가.
연인이라는 관계에서 우리는 수많은 모습들을 오간다. 썸머였다가, 톰이었다가, 다시 썸머였다가. 이 비루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이별을 계속 겪으면서도 우리가 또다시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Autumn을 만나서다. '1'과 함께 톰의 마음에도 새로운 햇빛이 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