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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흰 Apr 02. 2017

사랑에 빠지는 건, 하루면 충분해

오로지 눈과 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비포 선라이즈>


소위 로맨스 영화의 3대장이라 불리는 영화들이 있다. <이터널 선샤인>, <500일의 썸머> 그리고 <비포 선라이즈>가 이들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 작품을 모두 보았으며 수 없이 다시 보기를 했을 거라 의심치 않는다. 나 또한 브런치에서 가장 먼저 썼던 글이 <500일의 썸머>였다.


나에게 있어 이 세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바로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친구와 <500일의 썸머>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의 경우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나에게도 역시 썸머는 '나쁜 X'이었고 그저 그런 흔한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이 영화를 사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지독한 이별을 겪고 다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톰의 심정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지만, 여전히 썸머는 나에게 '나쁜 X'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이 영화를 나와 달리 보았다. 썸머는 톰이 만들어낸 여자친구의 모습일 뿐, 실제 썸머가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즉, 이 영화는 오로지 톰의 관점으로만 진행되기 때문에 톰이 생각한 대로 썸머가 묘사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탁 쳤다. 모든 연애사는 한 사람의 관점으로만 서술되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유리하고 누군가에겐 불리하다는 것을. 이후 다시 이 영화를 보니 썸머는 그저 평범한 ex일 뿐이었다.


ⓒ Daum 영화

사실 다른 두 영화도 마찬가지로 나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히 <이터널 선샤인>은 지금도 보면 어디가 그렇게 감동적이고 슬픈지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약 5번 정도를 보았는데, 아주 어렸을 때 정말 사랑을 모르던 시기에 보았을 때와 최근에 보았을 때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영화를 내 인생영화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비포 선라이즈> 또한 그랬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비포> 시리즈를 이렇게도 좋아하고 찬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번을 포함해 딱 두 번 보았는데, 처음 보았을 땐 뭐 이리 지루한 영화가 다 있냐며 열심히 10초씩 건너뛰곤 했다.


그러던 중, 며칠 전에 한 동영상을 보았다. 바로 메인사진인 그곳에서의 대화 장면이었는데, 셀린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오랫동안 만난 커플은 서로 뭘 해야 할지 뻔히 알기 때문에,
매너리즘을 느끼고 서로를 싫어한다고 말했지.
나는 너랑 반대야. 서로에 대해 완전히 아는 것이 진짜 사랑이야.
머리를 어떻게 빗는지, 매일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상황에 어떻게 말할 것인지... 그게 진짜 사랑이야.


셀린의 대사가 너무 크게 와 닿아 다시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최근 내가 하고 있던 생각과 너무 일치했기 때문이다.


ⓒ Daum 영화

나는 오랫동안 사랑에 비관적이었다. 이제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에 그런 생각이 참 웃기다고 생각하지만, 하나의 긴 연애가 나에게 큰 타격을 주었던 것 같다. 20살에 만나 21살에 헤어진 그는 나와 너무 달랐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 비해 그는 항상 누군가와 어울렸고, 나만을 신경 써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느라 나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사실 그때 우리는 모두 어려서, 한 발짝 씩 뒤로 물러서 서로를 배려할 줄 몰라서 그랬다고 쳐도, 지금도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슬프고 안타깝다.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치던 내 스스로가 가여워서. 그와의 오랜 연애와 또 오랜 질척임 끝에 결국 그 오랜 관계가 끝이 났을 때, 나는 너무 허무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오빠이자, 동생이자, 연인이었던 그가 내 인생에서 이제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이 공허했다. 아무리 우리가 서로를 힘들게 했지라도 가장 가까웠던 사이였는데, 그리고 언젠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데, 더 이상 그런 가능성 조차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그 이후 모든 연애는 영혼이 없는 연애였다. 그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땐 그랬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안 맞고 굳이 노력할 필요도 없고 언젠가는 헤어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연애를 했고 남자들로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왜 항상 헤어질 걸 먼저 생각하는 거야" 글쎄, 나의 오로지 하나이고 영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가서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나에 대해 더 깊이 알지 못하게, 나에게 더 다가오지 못하게 항상 연인과의 가상의 거리를 두곤 했다.


ⓒ Daum 영화

이런 나를 두고 가장 친한 친구가 "너 같은 애는 연애를 하면 안 돼"라고 말했다. 왜 그런 태도를 가져서 죄 없는 사람을 힘들고 아프게 하냐며, 그럴 거면 연애를 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내가 고민하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매일 내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그 당시에 만나던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카톡을 보내곤 했다. "00야, 오늘은 날씨가 춥네. 따듯하게 입고 나가~" 나는 이 말이 그렇게도 싫었다. 저런 잔소리는 우리 집에서 몇 명이나 하는데 누군가에게 더 듣고 싶지 않았고, 어차피 내 마음대로 옷을 입을 건데 뭣하러 신경 쓰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정말 이기적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뭐해?" 혹은 "뭐 하고 있었어?"였다. 당시 나는 휴학을 하고 있어서 집에 있으면 크게 할 일이 없었다. 주로 밥을 먹거나 낮잠을 자거나 영화를 보는, 이 세 가지가 일상의 전부였다. 나에게 뭘 하냐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차피 저 세 가지 중 하나일 텐데 도대체 뭣하러 물어보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싫증을 내곤 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자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너 진짜 이기적이다. 하지만 굳이 상대방이 뭐하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너가 신나서 먼저 오늘 뭐 했는지 이야기하는 게, 그게 진짜 좋아하는 감정 아닐까?"


그렇게도 나는 이기적이었다. 연애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거리를 두었고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했다. 아마도 그건 내가 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모든 것을 다 알아봤자 결국 끝날 연애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친구의 말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본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어릴 적부터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할머니나 엄마에게 달려가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말해주곤 했다. 사실 그런 말 또한 모두 상대방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나왔음을, 나의 일상을 시시콜콜 알려주려는 시도는 사랑받고 싶은 나의 마음이었음을 알았다.


ⓒ Daum 영화

그러다 그를 만났다. 마치 제시와 셀린이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는 그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비포 선라이즈>는 마치 홍상수의 영화처럼 제시와 셀린의 대화가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간다. 그들은 처음에 기차에서 시덥잖은 이야기나 농담 따먹기로 서로를 알아가고 비엔나에서는 더 깊은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의 차이점을 알아간다. 그리고 셀린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의 꿈에, 나는 너의 꿈에 나오는 기분이야"


사랑에 빠지는 것을 표현한 가장 좋은 표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치 '꿈'같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사랑에 빠지고 아주 사소한 것에 반하고 좋은 것만 보이는. 심지어 서로의 차이점까지 사랑스러워 보이는 그때가 있다. 영화에서만 나오는 그런 연애를 언제쯤 해보나 했는데, 드디어 나도 저런 연애를 하게 되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하루가 걸렸다. 다이어리를 보여주며 이름을 새겼다고 좋아하는 그에게, 사실 난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에게 빠져버렸다. 큰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마치 제시와 셀린처럼, 잠깐 동안의 대화가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기차에서 덜컥 내려버렸다.


상대방과 나의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그 과정을 너무나도 두려워하던 시기와는 달리,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어떤 것을 무서워하는지. 예전의 나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면 그가 싫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 있으며 서로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을 알더라도 묵인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그렇듯,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쌓아온 나의 견고한 세계를 흔들어 버리는 게 사랑이니까.


ⓒ Daum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보다 보면 몇 가지 눈에 띄는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어, 제시의 눈빛이라거나 셀린의 말들이 있다. 처음 사랑에 빠진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오랜 연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셀린을 바라보는 제시의 눈빛과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가감 없이 이야기는 셀린의 말 하나하나가 와 닿았다.


셀린은 사랑에 대해 제시와 이야기하던 중 이렇게 말을 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하는 모든 행동들은 더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닐까?


내가 그런 행동들을 하지 않아도, 굳이 애쓰지 않아도 나를 사랑해줄 이가 그 사람이기를 바란다. 비록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말과 눈빛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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