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만은 나의 바닥까지도 사랑해주길 바란다. <이터널 선샤인>
최근 이 영화를 자주 찾고 있다. 영화를 여러 번 보고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를 끊임없이 곱씹어 보곤 한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절대 행복한 이들이 찾는 영화가 아니다. 연인을 잃고 슬퍼하거나 끝이 다가오는 연애를 다시금 바로 잡고자 할 때 이 영화를 찾는다. 그리고 나는 후자다.
나는 사랑이 어렵다. 때론 무섭기 까지도 하다. 자꾸만 과거의 망령이 나를 쫓아와 행복한 현실의 나를 어질러 놓고 상대방과 나의 관계를 들쑤셔 놓는다. 그의 사랑을 걱정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혹시라도 그가 술자리에서 내 험담을 하고 있지는 않을지, 길 가다가 나보다 훨씬 예쁜 여자를 보고 남몰래 설레지는 않을지, 모든 것이 두렵다.
이런 나의 두려움은 사람에서 비롯되었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모든 이들이 지금의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때 혼자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나의 마음을 쿡 쿡 찌르곤 한다. 망령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나의 이 사실을 그에게 털어놓고 싶지만, 나를 부족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두려워 그동안 말하지 못했다. 과거로 인해 현실의 사랑을 놓칠까 두려웠다.
영화 속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 모두 그리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나의 얘기 같다. 속 좁고 스스로 화를 식히는 조엘과 감정적이고 모든 기분을 밖으로 쏟아내야 하는 클레멘타인, 너무나도 다른 그들이다. 결국 클레멘타인은 조엘과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모두 지워버린다.
클레멘타인의 결정은 감정적이고 즉흥적이지만, 그녀가 너무나도 잘 이해가 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아 내가 엉망이 되었는데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없다면 모든 상처를 지우는 방법은 그 사람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가 곧 성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어떤 이들은 유독 상처에 약하고 내가 그렇다. 이기적인 판단이지만 개인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적어도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자신을 지워버린 클레멘타인을 보고 화가 난 조엘은 똑같이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운다. 기억을 지우는 과정은 가장 최근 그녀와 싸웠던 하루로부터 그녀를 처음 만난 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그와 다툰 날이면 그와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싸운 방금 이 시점으로부터 그와 행복했던 시절, 그를 처음 만나고 설렜던 시간까지. 그러다 보면 싸움을 다 잊고 진정이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기억을 지우던 중 어느샌가부터 조엘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다. 그 후회의 시작은 이 장면부터이다.
클레멘타인 : 조엘, 나 못생겼어?
조엘 : 아니
클레멘타인 : 내가 어렸을 땐 못생겼다고 생각했어. 벌써 눈물이 나네. 가끔 사람들은 아이가 얼마나 외로운 지 모르는 것 같아. 신경 쓰지 않아. 어쨌든 내가 8살 때 가장 좋아하던 인형이 있었어. 못생긴 인형이었는데 그 인형을 클레멘타인이라고 불렀어. 그리고 계속 그 인형한테 소리를 질렀어. "못생긴 건 싫어! 제발 예뻐지란 말이야!" 정말 이상하게도, 내가 그 인형처럼 갑자기 예뻐졌어.
조엘 : 너는 아름다워
클레멘타인 조엘, 날 떠나지 마.
조엘 : 너는 아름다워...
과거의 상처로 인해 아파하고 있는 클레멘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녀를 위로해 준다. 내가 이런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를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조엘은 그의 변함없는 사랑을 약속한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더라도, 어떤 상처를 갖고 있더라도 오직 그 사람이기에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최근 나는 그에게 우울증을 고백했다. 5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우울증과 나를 여전히 고통스럽게 만드는 안 좋은 기억들을 모두 고백했다. 그러니 내가 상태가 많이 안 좋고 너를 자꾸 힘들게 만들어도 조금만 이해해달라고. 내가 그에게 고백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사랑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외면이었다. “시간을 갖자”는 말과 함께.
내가 우울증을 고백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시시때때로 기분이 변하고 예민하게 구는 나에게 그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지쳐있었고 나의 상처를 더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동시에 내가 우울증이라는 이유 만으로 끊임없이 그에게 방패를 쳐서 그는 나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칼도, 방패도 모두 내가 쥐고 있는 셈이었다. 서로 이렇게 힘들고 계속해서 싸움만 반복하니, 한 발짝 물러서서 조금 더 진정하고 우리의 상황을 바라보자는 게 그의 제안이었다.
물론 나는 그의 제안에 계속해서 저항했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말했음에도 그가 하는 말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너 힘든 거 안다. 그런데 나도 힘들다.” 이 뿐이었다. 나는 그 이상을 원했다. 너가 이렇게 아팠고 내가 몰라줬구나, 미안하다.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라도 말해줘서 고맙다. 때론 너가 아파서 그게 나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도 나를 사랑하고, 나도 너를 사랑하니 너가 조금씩 나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이렇게 친절하게 차근차근 말해주기를 바랬다. 내 기억 속의 그러면 이렇게 말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나에게 너무 지쳐있었고 나는 결국 ‘쉬어가기’를 선택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너무나도 필요한 나이지만, 그가 내 옆에서 너무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를 너무나도 이해한다. 우울증을 고백하기 전에 이미 내가 그를 힘들게 한 일이 너무 많아서 죄책감이 들고 너무나도 미안하다. 이 마음이 다시 나에게 돌아와 나를 더 힘들게 하지만, 나는 너무 그를 사랑하기에 이해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힘들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혼자 이것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다. 우울증을 고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잘못이 아닌데, 마치 나의 잘못이 된 것만 같다. 분명히 상처를 준 건 다른 사람이고 내가 남들보다 거기에 조금 더 취약한 것뿐인데, 나는 항상 혼자였고 혼자 이해하고 혼자 삭혀야 했다.
그러다 나를 이해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을 만나고 그에게 사실을 말했지만 단지 그는 이 모든 것을 담기엔 힘들었던 사람일 뿐이다. 내가 그에게 지나친 기대를 한 탓이다. 물론 나도 힘들다. 지쳤다고 말하는 그의 앞에서 노력하면 된다고, 우린 할 수 있을 거라고, 허공에 외치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아프다. 때론 그가 나에게 묻는다. "내가 모든 걸 제치고 너에게 갔으면 좋겠어?" 그렇다. 내가 최악일 때, 제일 힘들 때 그가 옆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어제 그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먼 길을 돌아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있었다. 모든 걸 제치고 끝내 나에게 온 그가 너무 고마웠다.
그럼에도 나도 그가 나와 함께하기를 바란다. 그가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와 나를 이해해주고 토닥여 주기를 알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모진 말로 밀쳐냈지만 그가 나에게 연락을 한다면 나는 모든 걸 다 잊고 다시 그에게 안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를 너무 사랑하고 그의 외면까지도 사랑하니까. 그때가 되면 최악인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을 거라고, 그가 나를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이터널 선샤인>은 말한다.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성향도, 가치관도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상처까지 끌어안아 사랑했고 기억을 지웠음에도 몬토크에서 다시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 서로 상처를 줄 것을 알면서도.
그가 이 글을 볼지도 모른다. 그는 브런치에서 글을 읽는 걸 좋아한다. 예전에 그가 자신이 왜 좋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너는 상처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야” 다행히도 아직 나는 지치지 않았다. 그를 떠나지 못한다. 그러니 나에게 상처를 주어도 상관없다는 걸, 그가 알기를 바란다. 단지 그 상처를 떠안을 수 있을 만큼 나는 그의 사랑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가 이 글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쏟아내는 말들은 모두 두서가 없고 혼랍스럽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저 나를 토닥여 주기를 바란다.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드니 우리 힘든 사람들끼리 함께 잘 헤쳐나가 보자고.
최근 즐겨 듣고 있는 노래가 있다. 줄리아 마이클스의 Issues인데, 그녀가 남자친구와 잦은 다툼으로 힘들어 만든 노래라고 한다.
Cause I got issues , but you got 'em too
So give 'em all to me and I’ll give mine to you
Bask in the glory of all our problems
Cause we got the kind of love
나는 문제가 있어 하지만 너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너의 문제를 내게 알려 줘, 그리고 나도 너에게 나의 문제를 알려줄게
서로의 문제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랑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