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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흰 Jan 16. 2020

나의 우울증 이야기 2

죽음에 관하여


우울증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 중 한 가지는 바로 '죽음에 대한 관심'이다. 자살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자살 시도를 해 보려고 한 적이 있거나, 실제로 해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곤 한다. 며칠 전 나는 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어떤 여자가 자신의 목을 매달라 죽어 있었다. 그 꿈을 꾸고 소스라치게 깼는데, 그 이유는 마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였다. 최근에 내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고, 어디서 하면 좋을지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어렸을 때이다. 무언가 엄마에게 크게 혼나고 혼자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21층이었는데, 창문을 활짝 열고 아래를 보며 생각했다. '그냥 떨어질까?' 당시의 나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조차 몰랐던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 수업 시간에 박완서의 <옥상의 민들레꽃>이라는 단편 소설을 읽었는데,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나에게 민들레꽃은 무엇일까? 민들레꽃이 있기라도  걸까?


이후 10대가 되어서는 내가 병에 걸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내가 힘 쓰지 않아도 되고 미리 죽음에 대해 준비할 수 있으니, 손 쓸 수 조차 없는 어떤 큰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고 싶었다. 나는 그정도였다.


나에게 있어 민들레꽃은 삶에 대한 미련이었다. 즉, 죽고 싶었던 많은 순간에 나를 잡았던 건 내가 아직 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 때문이었다. 더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아직 못해본 것들이 더 궁금했다. 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한 후에야 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야 삶에 대한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민들레꽃은 다양했다. 스카이다이빙, 에펠탑 보기, 뉴욕 여행 가기, 대학교 가기, 돈 벌어보기 등등 어찌 보면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동시에 어찌 보면 누군가는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는 이룰 수 있을만한 일들이었다. 딱 지금의 나다. 나는 내가 원하던 것들을 다 이루어 더 이상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우울증으로 인해 힘든 건 당연히 나 자신이다.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고 이유 없이 짜증이 나고 무슨 일이든 나 자신을 탓하기 때문이다. 모든 칼날이 나를 향해 세워져 있다. 예전에 창과 방패를 모두 내가 쥐고 있다고 글을 썼었는데, 아닌 것 같다. 나는 양 손에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이다. 한 손으로는 나를 찌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남을 찌른다. 절대로 내가 의도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나로 인해 남들이 힘들어할까 봐, 피해를 주는 것 같아 저질러놓고 후회한다. 잠도 못 자고 '내가 왜 그랬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밤새 괴로워한다. 그리고 결국 자책한다. '내가 엉망이라 그래' 제자리걸음이다. 나를 탓하고 남을 탓하고 결국 나를 탓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생각 회로가 반복되고 심해지면 나의 존재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이 들고 결국 살아있지 않음을 택하게 된다.


아마 반 고흐도 이런 이유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의혹도 있지만, 적어도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고 더욱이나 그 상대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었다면 더더욱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았으니, 그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지다 못해 지하로 더욱 파고들어 보이지도 않는 저 너머 어딘가에 추락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지금의 나 역시 그렇다. 나 혼자 괴로우면 괜찮을 텐데,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괴로워할까 봐 두렵다. 특히 내가 정말 오랜만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이 사람을, 절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은 이 사람을 잃을까 봐, 나로 인해 상대가 힘들어할까 봐 두렵다. 하지만 정말 우습게도 이런 나의 마음과는 달리 나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고, 남자친구를 괴롭힌다. 결코 끝나지 않는 악순환이다.


최근 남자친구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나는 왜 살까, 차라리 다시 태어나는 게 더 빠르겠어. 진심으로 나는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더 빠르겠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행복하게도 나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참으로 불쌍하게도 나는 칭찬에 인색한 가정에서 자랐다.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칭찬이라는 것을 해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꾸중을 더 많이 들었다.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해야 되는 거 아니냐, 너는 왜 아직도 애가 그렇게 예민하냐, 엄마가 너를 잘못 키운 것 같다 도대체 애가 왜 그렇게 차갑냐.. 나의 인성이든 능력이든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따듯하게 말 한마디 해준 적이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이 바로 임용고시에 붙었을 때이다. 나는 오로지 그 순간을 위해, 내가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부모님께 칭찬받는 그 순간 하나를 위해 일 년을 바쳐 공부했다.


그렇게 칭찬에 인색한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나 역시 남에게 칭찬이나 좋은 소리를 잘하지 못한다. 내가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건 오로지 그 당시에 만나는 남자친구 뿐이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배웠다. 나는 더 나아질 수 없는 인간이라고 배웠다. 우리 부모님이 바라보는 나는 여전히 철없고 예민하고 신경질 잘 내는 사춘기의 나이기에, 그들의 머릿속에서 나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분명히 나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었을 텐데, 그들은 지금의 나를 보지 않는다. 오로지 과거의 못된 나만 볼뿐이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아, 역시 나는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겠지. 그럴 바엔 차라리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를 거야.'


요즘엔 하루에 수도 없이 죽음을 생각한다. 목을 매달아 죽을까, 높은 건물에서 떨어질까, 또 어떤 방법이 있는지 내가 지금까지 봤던 영화나 드라마, 책들을 되새겨본다. 나에게 더 이상 하고 싶은 일도 없어 삶의 미련도 없고, 남자친구와의 잦은 다툼으로 내가 더 이상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이 나에게 다가올 때면, 나에게 이제 다 끝이라고 손짓할 때면 글을 쓴다. 마치 고흐가 죽기 전 1년 동안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나 자신에게 사로잡혀 끊임없이 글을 써 내려간다. 지금이 딱 그렇다. 고흐는 삶에 대한 열망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림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을 잊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는 그림을 그렸다면 나는 글을 쓴다. 다만 나는 좀 다른 것 같다. 나는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 죽음에 대한 환영으로, 글에 대한 집착으로 고통을 잊기 위해 글을 쓴다. 아직 짧지 않은 새벽이 남아서 두렵지만,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내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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