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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흰 Mar 10. 2020

자식의 이름으로

자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빈센트와 나의 이야기


오늘, 지금  방금 10년을 넘게 줄기차게 하고 다니던 목걸이를 잃어버렸다. 나에게 죽기 전 단 하나의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그 목걸이를 고를 정도로 나에겐 소중한, 16살 생일선물로 엄마가 선물해주신 미키마우스 목걸이었다. 외고에 떨어져 방에서 혼자 울고 있던 나를 일으켜 세워 백화점에 가서 사주셨던, 나에게는 눈물이 배어있는 소중한 선물이다. 10년을 넘게 엑스레이 찍을 때 빼고는 도저히 딸이 풀지를 않으니 엄마는 '더럽다'며 놀리시곤 하셨지만, 속으로는 괜스레 자신이 준 선물을 열심히 하고 다니는 나를 보며 뿌듯해하셨던 것 같다. 그 목걸이를 하고 다니면 어떤 소리가 들렸다. "너는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야" 그 소리에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일생을 노력했다.


부모와 자식 관계 역시 애착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주로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안정형 애착, 불안형 애착, 회피형 애착, 그중 나는 불안형이었던 것 같다. 동생과는 5살 차이가 나서 나는 태어나고 5년을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그중 1년 정도는 외할아버지가 아프셔서 떨어져 지냈고 나머지는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마 엄마도 서툴렀을 것이다. 내가 첫 자식이니 얼마나 헤맸을지, 얼마나 당황스러운 때가 많았을지 상상이 되곤 한다. 6살 때 동생이 태어난 뒤론 나는 항상 뒷전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로 동생에게 화가 났느냐면 하루는 한 살배기 동생이 자고 있는데 동생 입에다가 발가락을 넣어버렸다. 물론 지금은 나보다 훨씬 크고 통통하지만 여전히 아가 같은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이다.


그보다 훨씬 더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비슷했다.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아팠다. 나는 그냥 몸이 허약하다면 동생은 크게 아팠다. 아주 어린 나이에 팔이 부러져서 수술대에 올라가고, 갑상선이 아파 오랫동안 약을 먹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혹은 내가 무엇을 이뤄내든 우리 엄마는 잘 몰랐다. 그냥 조용히 영어학원을 다니던 애가 외고를 준비하는 게 어떻겠냐고 갑자기 학원에서 연락이 왔던 때도 있었고, 처음으로 간 학부모 상담에서 서울대 진학 준비를 추천받던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너가 이렇게 공부를 잘했어?"


ⓒ Vincent Van Gogh

빈센트의 일생이 불행했다면, 그중의 아마 최악은 부모와의 관계일 것이다. 인간관계의 시작은 부모인지라 대체로 부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더 넓은 세계에서도 어려운 법인데, 바로 빈센트가 그랬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빈센트'라는 이름은 빈센트 형의 이름이다. 다만 형은 태어나자마자 그 날 바로 죽어서 만 하루도 살지 못했다. 따라서 부모는 죽은 형의 이름을 따라 둘째 아들을 '빈센트'라고 지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이름이 지어진 그의 시작부터 죽음이 드리워졌다고 이야기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그저 부모가 아들을 잘못 대한 것이다.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것에서 부모가 평생 어떻게 그를 대했을지 그려진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그의 아들 역시 목사가 되기를 원해 개신교 목사가 운영하는 기숙학교로 보냈다. 그러다 그는 구필화랑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줄곧 그의 관심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그림을 취급하기보다는 좀 더 가난한 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도움보다 종교적 지식을 강조하는 개신교 분위기 속에서 그는 적응하지 못하고 곧 그만두었다. 그리고 가장 짧지만 가장 열정적이었던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이렇게 화가가 되기 전 빈센트의 삶을 짧은 글로 압축해서만 봐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얼마나 소원했을지 느껴진다. 어머니와는 테오의 아들이 태어난 뒤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그저 안부 정도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단 한 장의 편지도 주고받지 않았다. 다만 빈센트와 아버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편지가 있는데, 1883년 겨울 빈센트가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편지에서 빈센트는 아버지가 자신을 '미친 개'라고 생각하며 아버지는 '미친 개를 쫓아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얼마나 집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닌지,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글이 나의 가슴을 조였다.


ⓒ Vincent Van Gogh

나는 오랫동안 나의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엄마는 나만 보면 잔소리만 하기 일쑤였고 아빠는 나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 빈센트처럼, 나 역시 평생을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수년을 노력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가만히 있어도 '막둥이', '아가'라는 말을 듣는 동생과는 달리, 나는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또 한 번 대학교 입시에 실패했다. 소위 말하는 SKY 대학을 다 떨어진 그 날은 그저 부모님께 죄송하고 또 죄송한 날이었다. 심지어는 그 날 이모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너만큼 엄마랑 아빠도 속상할 거야"


이런 나에게 임용고시는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임용고시에 붙은 날 엄마는 나보다 더 축하 전화를 많이 받았다. 몇 달 전 할아버지 장례식에서는 엄마와 아빠를 찾아온 조문객들에게 "아 여기가 이번에 선생님 된 우리 큰 딸"이라는 소개를 받으며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것이 부모님께 사랑받는 자식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울증 치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엄마에게 밤에 울면서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죽고 싶다고,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나는 필요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썼다. 그 카톡을 읽은 엄마는 몇 초만에 울며 나의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렇게 몇 시간을 엄마와 함께 울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함께한 모든 순간 동안 나를 사랑했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울컥 또 눈물이 났다. 내가 굳이 나의 능력을 증명하지 않아도,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이 마치 비어있던 내 마음의 구멍을 채워주었다.


결국 부모와의 관계가 회복된 나와는 달리, 빈센트는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평생을 자신이 아버지를 실망시켰다고 느끼며 살았다. 어쩌면 죽는 날 까지도 아버지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삶이 그렇게 비참했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마 그 어떤 부모보다도 소중하고 애틋했던 동생 테오가 있어서 그럴 것이다.


ⓒ Vincent Van Gogh

오늘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생각했다. 많이 슬프고 눈물을 흘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멀쩡했다. 사실은 줄이 끊긴 상태에서도 몇 년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언제든 잃어버려도 말이 되는 일이었다. 그저 "때가 되었다"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엄마와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 나의 자취방에서, 나의 가장 큰 성취가 이루어진 이후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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