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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흰 Nov 23. 2020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내가 죽지 않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


매 년 겨울은 나에게 너무나도 힘든 계절이다. 이상하게도 10월 중순이 되면 미친 듯이 우울해져서 하루 종일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가면 조금 나아진다. 작년에 처음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게 된 시기도 딱 이맘쯤이다. 매 년 비슷한 시기에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가 괜찮아지곤 한다. 11월 중순이 지나면 나아지는 이유가 좀 웃긴 것이, 11월 중순에는 내 생일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 생일을 축하해주면 나는 그때 서야 비로소 죽지 않기를 결심한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힘들었다. 개그우먼 박지선 씨가 돌아가시고 나서 절망에 빠졌기 때문이다. 겉으로 봤을 땐 밝고 긍정적인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 속에는 아픔이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녀와 비슷해 나에게도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매일 밤을 울면서 잠이 들었고 어떻게 하면 자살할 수 있는지 인터넷에 검색도 해보고 하루는 목을 메달로 죽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겉으로 보기엔 나는 밝고 긍정적이고 무엇이든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엄마조차도 의아해했다. 결혼 준비로 그 누구보다 행복할 텐데 도대체 어떻게 자살할 생각을 하냐며. 참 신기한 게 우울증이라는 것은 겉과 속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고 마냥 행복할 것만 같은 사람이 속으로는 가장 큰 아픔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나에게 박지선 씨가 그랬다. 좋은 학벌에, 밝은 성격에, 뛰어난 말솜씨, 모두 내가 그녀로부터 닮고 싶은 것들이었다. 그렇게도 맑아보였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자 동시에 그녀의 마음이 크게 공감되기도 했다.


이런 나의 생각과 마음을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일주일 뒤에 오라고 했다. 더 길게 두면 안 될 것 같다면서 자주 봐야 한다고 했다. 정신과 선생님들을 몇 분 만나보진 못했지만, 이 분은 나의 깊은 것들까지 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예전에는 분명 나는 치료를 하러 간 건데, 일부러 괜찮은 척, 다 나은 척 연기하곤 했다. 하지만 이 분 앞에서는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곤 한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하는 것보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혼자라고 생각했다. 주변 친구들도 나를 싫어하고 남자친구도 언젠간 나에게 싫증난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 년 생일은 가족과 남자친구로부터 축하를 받았지, 그 외에는 별다른 축하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올해 생일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내가 예상치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평소에 내가 아끼던 사람들이 나의 생일을 축하해주니 더욱 신이 났다. 나는 연인관계에 있어서든 친구관계에 있어서든 혼자 사랑을 퍼주는 편인데, 나의 생일만큼은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홀로 '나는 친구 없어도 괜찮아'라고 생각했던 건 다 거짓말이었다. 나도 사랑받고 싶었고 관심받고 싶었다. '혼자여도 괜찮다'는 정신승리는 우울증이 있는 나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이 결국 나를 다시 살게 만들었다.


반 고흐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끊임없이 말한다. 나도 '사랑받고 싶다'라고. 그도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남들처럼 똑같이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다. 만약 그가 사랑받았더라면 그의 외로움과 고통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예술작품이 사라지는 아이러니가 있겠지만, 그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고 실패했다.


그러다 그가 온전한 사랑을 느낀 유일한 존재가 바로 동생의 아들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아끼던 형제에게 아이가 생기자, 고흐는 신이 나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 단순히 아몬드만 달려있는 나무가 아니라, 꽃이 달려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피어낸 꽃처럼 고흐 역시 자신의 조카가 힘든 일이 있어도 결국 해낼 것이라고 기도를 해줬는지도 모른다. 나와 너무나도 비슷했던 그의 짝사랑이나 다름없는 사랑 방식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나의 사고방식은 매우 위험하다. 내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받는 대상이 사라지면 나는 완전히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너질 때마다 나는 강해지지 않았고 도리어 약해지곤 했다. 그래서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 사람도 언젠간 사라지지 않을까?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라는데, 그것 역시 나에게도 너무 힘든 일이다. 내가 나 스스로 느끼기에 나는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죽음에 사로잡힌 나에게 몇 사람이 건넨 축하의 말은 나를 다시 살아가게 만들었다. 아니,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어쩌면 나는 이런 것들을 여러 개 더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하나가 사라져도 내가 주저앉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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