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앞두고 가구를 보러 다니는 중이다. 예산 안에서 원하는 물건을 고르는 일은 소풍 가서 먹을 간식을 고르는 어린 시절처럼 즐겁다. 그러다가 동네의 카펫 전문점에 갔을 때 겪은 일이다. 카펫의 색과 크기를 자세히 불어보려고 주인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가 속사포 같은 말투로 우다다다 쏘아붙여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한 간 정도면 되겠네요.'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한 간이라면 사이즈가 어느 정도죠?" 질문하자, 아저씨는 내가 들고 있던 수첩에 '一間'이라고 한자를 쓰더니, 업신여기듯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 간이 뭔지 모른다면, 중학교 다닐 때 제대로 공부를 안 했다는 증거요."
*한 간 1.81818미터
[나의 문장]
중3 때, 우리 식구는 미국에 사는 고모댁에 방문했다. 눈에 담는 모든 것이 궁금했고 손에 닿는 많은 것이 신기했다. 문제는 언어였다. 영어라고 해봐야 중학교 3년 동안 배운 게 다였던 내 눈에 영어는 그저 꼬부랑 글자였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해독이 불가능한 암호였다. 그러다가 어느 쇼핑몰의 잡화점에 갔을 때 있던 일이다. 잡화점 입구 오른쪽 벽면에 작고 네모난 상자들이 전면을 응시하며 쭉 진열돼 있었다. 보통 껌, 사탕등이 있어야 할 자리였으니 미국에서만 파는 간식이거나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뒤를 따라 들어왔던 아버지께 천진하게 물었다.
"이건 뭐예요?"
내 시선을 따라 벽면에 달려있는 물건을 한참 들여다보던 아버지가 정색을 하며 말씀하셨다.
"몰라. 몰라도 돼. 저쪽으로 가봐. 카메라 사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그때 난 아버지가 영어를 몰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이야기]
아버지가 20여 년 전 빌려갔던 돈을 갚으라는 친척분이 나타났다. 외가 친척이라 친정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오셨다. 수소문해서 전화번호를 알아냈을 정도로 서로 연락을 끊고 지낸 친척이었다. 만나서 확인하고 주겠다는 어머니의 제안에 상대는 무조건 계좌로 돈만 보내라는 문자를 보냈다. 피싱일지 모르니 절대로 돈을 보내면 안 된다는 딸들의 만류와, 수시로 날아오는 친척의 독촉문자 사이에서 어머니는 끼니도 거른 채 벌벌 떨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게 속시원히 따져 묻지를 못하는 것이 의아했다.
우여곡절 끝에 친척분과 어머니가 만났다. 스무 해가 훌쩍 넘도록 수천만 원에 달하는 큰 빚을 한 번도 독촉하지 않았던 이유, 일부는 통 크게 탕감해주려 했던 이유는 아버지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친척분이 말한 이유였다. 아버지 대신 빚을 일부 갚고 나서 평소처럼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퍼붓지 않은 어머니의 이유 역시 아버지였다. 저 인간이 끝까지 내 속을 썩인다면서도 아버지의 썩어가는 속내가 더 신경 쓰였던 걸까. 어머니는 그렇게 사건을 덮었다.
이 상황을 모를 리 없건만 사건의 당사자인 아버지는 기억도 희미한 일이라며 말끝을 흐리고 침묵을 택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길을 나섰다가 저녁이면 틀림없이 귀가해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평생의 루틴을 따르고 있었다. 그 틈을 비집고 따져 물을 용기가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없었다.
30년 전 미국에서 중학생 딸이 물어본 질문에 아버지가 답하지 못했던 이유를 지금은 안다. 아버지는 그 정도 영어는 쉽게 읽을 줄 아는 분이었다. 잡화점 벽면에 있던 물건의 이름은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말할 수 없던 단어였다. 남성용 피임도구라는 말을 차마 소리 내어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던 것이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었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아직 많은 것을 담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나 사이에는 무수한 단절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버지를 알고 이해하려고 얼마나 노력했었는지를 자책하는 순간이 더러 오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속시원히 하지 못하는 말이 많아 보인다. 여전히 나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 존재하는 딸이며 어쩌면 영원히 알지 못하는 일이 많을 테지만, 단절도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