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Nov 06. 2024

말대신 글로 전하는 마음

"면목이 없다."

아버지의 이 말이 제 마음에 쿵 하고 떨어졌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며 황급히 전화를 끊은 이유입니다. 면목이 없다니요. 아버지가 왜요. 무엇 때문에요. 얼마 전, 이십여 년 만에 나타나 오래전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어머니와 저희를 잠시 당황케 했던 지인의 일 때문이라면, 면목이 없다는 말씀을 거두어주세요. 그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혼란스러웠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 말씀도 없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계셔서 답답한 마음은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어떤 원망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애잔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무력감이 몰려오셨을 테죠. 열심히 우직하게 일만 하면서 살아온 당신의 인생이 꽤 쓸쓸하고 부질없게 여겨지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그깟 돈 때문에 그럴 일은 아닌데 말입니다. 


열심히 사셨습니다. 

단 하루도 함부로 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아버지는 매일 이른 하루를 시작하셨지요.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간단한 아침과 우유 한잔으로 빈속을 채우고 일터로 나가셨습니다. 주중이든 주말이든, 일이 있건 없건, 사무실에 있어야 하건 현장에 나가야 하건 상관없이 1년 365일을 출근으로 꽉꽉 채우셨습니다. 몇 년 전 은퇴를 선언하셨지만,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키우는 닭들의 모이를 주러, 텃밭을 일구러, 가끔 생기는 일을 하러, 지인들을 만나러, 같은 시간에 나가고 같은 시간에 들어오셨지요. 그 한결같은 삶이 존경스럽습니다. 

삶의 많은 굴곡과 풍파를 맞으며 흔들릴 만도 하고 흐트러질 만도 했을 텐데, 흔들리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셨습니다. 일상을 흐트러짐 없이 살아내는 사람은 큰일도 의연하게 맞설 수 있는 단단함을 갖게 되는 법인가 봅니다. 아버지처럼요.


단정히 사셨습니다. 

아버지 방은 늘 단정합니다. 깔끔한 성격의 어머니는 아버지 베갯잇이 쉬이 지저분해진다며 투덜거리시지만 곧이어 아버지만큼 깔끔한 사람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각 잡고 서 있는 방이 보입니다. 12월 말일에 경건한 마음으로 다음 해 일정을 정리해 둔 큰 달력과, 로션과 약병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화장대, 딸들이 사준 모자를 하나하나 따라 걸어둔 자바라 옷걸이. 하지만 압권은 서랍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각을 맞추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만 같습니다. 

단정하고 꼼꼼한 사람은 다정할 수밖에 없는 걸까요. 어머니의 생신과 결혼기념일을 살뜰히 챙기셨지요. 딸들의 결혼기념일에 잊지 않고 메시지를 보냈고 매년 우편으로 연하장을 보내주시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오래전 함께 했던 직원들이 아직도 명절 때 잊지 않고 선물을 보내는 걸 보면, 사람을 챙기는데도 단정하고 꼼꼼하셨었나 봅니다. 남자는 속정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었는데, 아버지의 속정을 알아봐 준 사람이 많은 것이 감사해지는 요즘입니다. 


정직하게 사셨습니다. 

사업 실패로 생긴 빚, 여태 갚지 못했던 빚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을 우리 가족 모두 거둘 수는 없겠지만, 스무 해가 넘도록 독촉 한번 없이 기다려준 것은 아버지를 신뢰하기 때문이었다는 지인의 말이 제게는 꽤 감동스러웠습니다. 얼마나 단단한 믿음을 주셨으면 그럴 수 있을까요. 틀림없는 사람,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수식어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만한 나이가 된 저로서는, 그런 아버지가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끝끝내 지키려 했던 아버지의 원칙과 소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큰돈을 벌지도 못했고 영악하게 세상을 살지는 못했지만, 원칙과 소신만큼 힘이 센 것을 저 역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면목이 없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보여주신 많은 것에 감사한다고 말씀드릴 수는 있어요. 그 감사함을 전하지 못해 죄송했고요. 

사랑해, 행복해, 미안해, 고마워, 힘내... 이런 말들은 너무 흔해서 상대의 마음에 가닿지 못한다는 글을 봤습니다만, 저는 이런 식상한 말들조차도 아버지께 많이 못 하고 살았습니다. 여전히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잘 못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 글로 전합니다. 


늘 감사드려요.

많은 것이 죄송해요.

아버지가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방어회 맛을 알아버린 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