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로 만난 사이라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자녀 얘기로 흐르곤 한다. 겸손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탓인지 이야기는 자식으로 인한 맘고생, 몸고생이 주를 이룬다. 간혹 세련된 기교로 자식 자랑을 하는 이들도 있고 나도 가끔은 은근슬쩍 걱정이나 하소연으로 포장한 자랑을 한다. 뒤돌아서면 공허함만 따르는 것이 자식 이야기인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정신적인 탯줄을 끊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엄마 된 이의 삶에서 자식 이야기는 스테디셀러다.
밖에서 나눈 대화는 현관문에 들어설 때 탯줄 끊듯 말끔히 잘라내고 들어와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집에 오면 더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얼마 전 지인과의 대화도 그랬다. 재테크나 교육정보에 빠삭한 그녀는 자식들에게도 유용한 정보를 수시로, 적극적으로 전한다고 했다. 아들이 군 적금으로 착실하게 모은 돈은 제대와 동시에 채권, 주식에 넣도록 했고, 전역을 하자마자 일주일의 휴식 후 코딩, 영어학원에 등록하게 했으며, 복학하려다가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있어 바로 미국으로 보냈단다. 그렇게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고 목돈을 만들 수 있게 하려면 부모의 강제가 약간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나면 늘 기분이 처졌다. 정보도, 경제력도, 강제력도 부족한 엄마가 나였기 때문이다. 지인은 잘 찾아보면 행정 부처마다 대학생들을 위한 지원 사업이 많다고 했다. 자녀 스스로는 절대 알아보지 않으니 부모가 나서서 알려주고 진행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그런 얘길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게 어수룩한 나를 들켰다는 데서 오는 수치심때문인지, 나의 교육관이 상대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자격지심때문인지 잘 모르겠으나 머릿속은 돌멩이 하나가 날아든 연못처럼 뿌여졌다.
난 늘 자식에게 강권하는 것을 주저했다. 그게 먹는 것이든 물건이든 진로든 경제적인 문제든 상관없이 그랬다. "엄마 말 들을 나이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와 같은 말로 얼버무렸다. 간혹 똑부러지는 엄마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는 날에도 아들들에게는 뭐라 말하지 못했다. 나 같은 엄마라도 아들들은 충분히 제 살길 찾아서 잘 커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것은 내 몫이지 아들들까지 흔들어서야 되겠냐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맘의 소요가 컸나보다. 귀가 후 게임 세계의 문을 열려는 아들에게 다가가 낮에 들었던 얘기를 전하고야 말았다.
"엄마 지인에게서 들었는데, 학교마다 자매결연 학교로 가는 교환학생 프로그램도 많고 나라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도 많대. 너도 지금 하는 일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그런 프로그램이든 어학연수든 가보는 게 어때? 아무리 진로를 정했다고 하지만 너무 일만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데... 대학생 때야말로 이것저것 경험해 볼 수 있는 시간이잖아.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고."
아들은 나를 똑바로 보며 딱 한 마디를 했다.
"난 그런 시간도 아까워!"
순식간에 잔소리로 둔갑할 얘기를, 정보랍시며 너무 정성스럽게 늘어놓은 꼴이 됐다. 어차피 한마디도 더 하지 못하고 후퇴할 거면서 말이다. 하지만 섭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의 말에 그때까지 심하게 흔들렸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더 이상 내 몫이 아니다. 내 삶이 아니다. 그가 꾸려가야 할 그의 삶이다.
얼마 전 읽었던 심윤경의 소설 <설이>가 생각났다. 소설 속 화자인 설이는 끊임없이 어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떤 것이 자녀에게, 아이들에게 필요한 부모의 역할, 어른의 역할인지 제대로 알기나 하냐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해보라고. 사랑한다면서 왜 서로를 숨 막히게 하냐고.
책을 읽고 났을 때 떠오르는 핵심 단어 몇 개가 내게 답을 주었다. 나침반, 메트로놈, 은은함, 달콤한 무심함.
"아기 때부터 네 배의 중심에는 나침반이 딱 서 있었어. 그걸 보고 생각했지. 아 이 아이는 방향을 잃어버릴 일이 없겠구나.... 넌 항상 네가 원하는 걸 알고 그쪽을 찾아가거든. 나침반은 처음엔 원래 많이 흔들리지만, 결국 옳은 방향을 향하니까."
자식들, 아니 사람에게는 각자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나침반이 하나씩 있다. 한없이 흔들려서 제대로 길을 찾아가는 게 힘들 것이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영 못 찾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의 나침반을 빼앗아 들고 길을 찾아주며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반보 뒤에 서서 메트로놈 같은 규칙적인 속도와 호흡을 전해주면 된다. 언제든 힘들면 뒤돌아 안길 수 있게 은은한 향기를 풍기다가 필요한 순간 적당한 압력으로 꽉 안아줄 수 있으면 된다. "허술하고 허점투성이인 부모 밑에서 누리는 내 마음대로의 씩씩한 삶"은 나와 내 아들들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구절이었다. 흔들릴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문장이기도 했다.
"난 그런 시간도 아까워!"
아들의 이 씩씩한 말이 나를 잡아주었다. 뚜렷한 삶의 목표를 품고 매일을 열심히 가꾸어나가는 아들에게 교환학생, 어학연수 따위의 정보는 필요한 게 아니었다. 자기 용돈은 자기가 벌어 쓰는 아들에게 재테크니 주식이니 채권이니 하는 계획도 그의 세계요 그의 몫으로 넘기는 게 맞았다. 부족하고 잘 모르는 부모 앞에서 자기만의 나침반을 들고 씩씩하게 걷고 있는 아들 덕에, 내 나침반 바늘은 비로소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