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어머니 댁에 가면 내가 어렸을 적에 그린 그림이 한 점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둘째 여동생이 "엄마 짐 정리할 건데, 오빠 가져가고 싶은 것 있으면 챙겨" 했는데, 49재를 지내자마자 토론토로 바로 돌아와야 했기에 "됐어, 난 이민 갈 때 다 가져갔잖아"하고 어머니 유품 하나를 챙기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그림을 가져오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일보 어린이 미술 사생대회에 나가 국무총리상을 탄 그림인데, 나에게도 추억이 진한 것이지만, 어머니가 나를 보듯 하실 것 같아 이민 올 때 놓고 왔던 거다.
그 그림은 덕수궁의 석조전을 크레파스로 그린 것인데, 건물의 앞을 그린 게 아니라 뒤쪽 옆모습을 그렸다. 대개 어린이들은 건물의 앞을 그리는데, 옆을 그렸기에 심사위원들의 눈에 띄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큰 상을 받았다.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고 어머니로서는 자식 키운 보람을 느끼셨을게다. 그래서 그 그림은 사십여 년이나 되는 세월까지 입혀져 나에게는 소중한 물건이기도 하다.
화강암으로 1909년에 완공된 석조전은 영국인이 설계한 서양 건축의 대표 건축물로 고종 황제의 접견실과 침실로 사용되던 문화재다. 어린 눈에 잡힌 이 특이한 건축물이 나에게 화가의 꿈을 꾸게 했고, 난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덕수궁 석조전은 1909년에 영국인이 설계한 서양 건축의 대표 건물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캐나다 대사관을 갈 일이 있었다. 서울시청 뒤 코오롱빌딩에 있던 기억으로 거길 갔더니, 덕수궁 뒤쪽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대한문을 끼고 정동길을 따라 대사관을 찾아가며 자연스레 이런저런 추억이 떠올랐다.
어머니를 쫓아 미술대회에 갔던 때. 그때는 그림 그리기보다는 김밥과 사이다 먹는 재미, 넓은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것이 더 흥미 거리였다. 그렇게 넓은 잔디는 고궁에서 밖에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MBC가 정동에 있던 신입사원 시절, 점심시간을 짬 내어 덕수궁에서 열련던 파카소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거장의 예술과 광대함에 흠뻑 빠져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 돌아간 일. 그리고 회사 업무로 문화광관부와 ‘덕수궁 음악회’를 기획했던 추억 등이 섞여 한 편의 시네마를 만들었다.
덕수궁 음악회를 기획하며 알게 된 궁의 역사.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만 알았던 덕수궁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조선의 아픔과 슬픔이 함께하는 곳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버려 선조가 왕족의 집에 임시로 거처하게 되자 궁의 모습을 갖춘다.
광해군이 즉위하며 잠시 머물렀고, 인목대비가 폐서인 생활을 하며 수모를 겪었던 곳.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던 치욕적인 일이 있을 때, 왕태자비의 거처로 사용된 곳.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강제로 넘겨주게 한 뒤에 거처하던 곳이 바로 덕수궁이다.
정동교회 앞에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작곡한 이영훈 추모비가 있다.
정동길은 바닥의 아스팔트를 뜯어 내고, 육상 선수들의 트랙에나 깔릴 듯한 푹신한 고무 같은 재질로 대신했고, 마감은 전통 문양을 넣은 보도 불럭으로 멋을 더 했다. 길 군데군데, 아담한 예술 조각들이 소박한 화단과 어울려 정갈함을 만들었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에 익은 노랫소리도 분위기를 보탰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 갔지만/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언젠가는 우리 모두/세월을 따라 떠나 가지만/언덕 밑 정동 길엔/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광화문 연가>를 작곡한 이영훈 추모 노래비에서 나오는 소리는 노랫말의 그 정동교회 앞에서 더욱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영훈의 모교인 배재고등학교가 정동교회와 붙어 있었다.
<광화문 연가>를 작곡한 이영훈의 추모비
정동극장과 예원여고를 지나, 러시아공사관을 올라가는 비탈길에 캐나다 대사관이 있었다.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이라는 가사가 나도 모르게 자꾸 맴돌았다. 어찌하다 세월을 따라 캐나다로 떠나 왔지만, 우리 가슴속에 ‘덕수궁 추억’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일까? 아참! 서울에 다니러 간 우리 아이들에게 “덕수궁 가봐라”는 말을 잊었네. 허긴 그 아이들이 우리의 그 기분을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