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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르네바 Jun 13. 2023

가족은 소중하다고? 아, 제발.

<가족을 폐지하라>, 소피 루이스

HBO의 드라마 '몸을 긋는 소녀'에서 카밀 프리커(에이미 아담스 분)는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오랜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에 허우적대며, 그것의 가시적인 형상으로 자신의 몸에 수많은 '빗금'을 긁는다. 가족, 그 중에서 특히 엄마인 아도라 크렐린(페트리시아 클락슨 분)이 카밀의 고통의 중심에 서 있는다는 건 이야기의 초반부터 분명하게 묘사된다. 극 후반, 카밀의 자해는 엄마가 자신을 해치게 두는 대신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해치는 선택의 결과였다는 것이 서서히 드러난다. 카밀에게 가족은 자신의 몸처럼 무수한 금이 간 깨지기 직전의, 그러나 절대 깨지진 않는, 손에 쥔 유리병 같은 것이었다. 쥔 손을 절대 펼 수 없다. 피흐르는 손바닥의 미약한 악력으로 그나마 부서지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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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순한맛으로 가보자.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 생각하는 애프터썬(2022)에서 소피(프랭키 코리오 분)는 어릴 적 아빠 캘럼(폴 메스칼 분)과 함께 떠난 튀르키예 여행을 성인이 되어서도 반복하여 회상한다. 그녀는 기억 속 어딘가 붙잡힌 것처럼 보인다. 여행 당시 아빠 나이 비슷하게 성장한 소피. 자신도 모르게 전이된 청년 캘럼의 고뇌 섞인 불안감을 몸소 느끼며 불가능한 위로와 애도를 하고 있던 건 아닐까. 여행의 단편들을 기록한 선명한 캠코더 영상 속에서 소피는 캘럼의 마음을 훑는다. 소피가 읽는 캘럼의 내면의 해상도는 얼마나 될까. 그 아래 덮인 소피 자신의 내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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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 프리커와 소피가 그저 극화된 인물의 과장된 경험이라고 느껴지는가? 나는 그렇지 않은데. 불행한 가족은 예외적이라 생각한다면, 주변에 맘 맞는 친구가 없다거나 연애를 망쳤다고 징징 댈 자격이 없다. 가장 근원적인 고통의 원인은 친구나 연인이 아니니까. 그것은 가족이다. 수많은 카밀과 소피들에게 둘러싸여 메리를 놓친 팀(어바웃 타임의 두 등장인물이다) 신세를 슬퍼한다면, 자신의 정신건강을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너무 단언적이고 독단적으로 말하고 있는 걸 안다. 불쾌한 부분이 있다면, 잘못을 인정한다. 그러나, 난 그만큼 강력히 주장하고 싶다. 가족은 절대로 훼손되어선 안 될 일종의 '절대가치'가 될 수 없다. 가족은 '정상성'의 한 부분도 아니며, 사실 많은 비정상이 가족에게서 비롯된다. 이런 통계자료가 있을 법하진 않지만, 가족을 마음의 안식처라 진심으로 여기고 느끼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합리화에 능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과 희생을 대승적 차원에서 판단하려고 하겠지만 분통 터지고 우악스러워지는 순간들에 대해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 것인지, 아주 궁금하다.


행복한 가정을 두고 '거짓말하지마!'라고 말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 또한 가족관계가 원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기에 객관적인 입장이 아닐 수 있다. 그것과 별개로, 우리가 가족이라 부르는 집단 형식에서 기대하는 기능들을 가족이 정말 잘 수행했다면 우울증과 자살의 증가율과 높은 수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초등학교 때부터 가화만사성이니 어버이날 카네이션이니 뭐니 하며 수선을 떨고 '다 좋은데 가족은 건드리지마'라며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호해 온 그 가족이란 것이, 당신의 성인 이후 불안한 정서와 고립감, 성격적 결함들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해 왔는지 제발 잠깐이라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당신이 가족을 위해 해 온 희생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으며, 더 나은 대접을 받아 마땅한 당신을 줄곧 무시해 온 사람들은 가족구성원이기 이전에 당신을 향한 죄인이다. 돌봄노동도 노동이다. 가족 내 어떤 역할을 (대개는 강제되지만) 맡았기에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는 거다. 애초에 인간관계에 의무를 지운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지만.


가족이라는 허울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다. 행위는 행위자로부터 독립적이다. 행위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던 무관하게, 그 사람의 행위 자체만을 두고 그를 판단해야 한다. 가족관계 또한 하나의 인간관계에 불과하다. 가족 간 기본권 침해도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반드시 되어야 한다. 가족 구성원들 각각은 한 개인으로서 서로를 대면해야 한다. 거기에 위계가 존재해선 안 된다.


가족에게 돌봄 의무를 전담시키는 현대 가족제도가 얼마나 구시대적인지, 아직 한국 대다수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차별금지법 통과도 이토록 힘든데, 대안 공동체 모색은 그것의 제대로 된 논의부터 이미 여기선 유토피아적이다. 그럼에도 조금씩이나마 파열을 일으켜야 할 필요성을 느껴, 이런 글을 적고 있는 것이다. 원부모의 자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도 일종의 '자연'으로 '인간본성'으로 여겨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까지 문제삼는다고?'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어린이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자. 어떤 가정의 아기로 태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1% 확률이라도 학대 가정에 태어날 수 있다면? 마치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처럼,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꽤나 분명하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 가족이라는 종교는 가족이 앞으로 그런 역할을 하리라는 빛나는 희망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확실한 소속, 신뢰, 인정, 충만의 가능성을 붙잡으려고 한다. 굶주림이나 구속과는 정반대되는 무언가. (소피 루이스, <가족을 폐지하라>, 서해문집, 25쪽)


소피 루이스의 <가족을 폐지하라>(서해문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가족폐지론을 처음 접해본 나로선 정말 '사이다'같은 책이라 여겨졌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후기 독서를 이어갈 생각이다. 나의 격분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혹 대화를 나눠볼 의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너무'(어법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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