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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르네바 Jun 15. 2023

디스토피아에서도 사랑을 외친다

<이어즈 & 이어즈>의 이디스(E.D.I.T.H)

드라마를 보며 이토록 벅찬 감정을 느껴보는 건 처음이었다. <더 글로리>의 복수가 정점을 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권선징악의 쾌감을 주었지만, 거기에 잠시 푹 빠져 흐느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매 에피소드마다 가슴이 먹먹하여 화면을 끄고도 한동안 멍했는데 '글을 써서 이 감정을 어떻게든 기록해 놓아야겠다'식의 감정은 아니었다. <이어즈 & 이어즈>의 마지막화에서 난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이디스(제시카 하인스 분)와 함께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다. 나도 드라마의 일부가 되어 이디스 곁에 서고 싶었다.








드라마가 묘사하는 세상은 근미래, 즉 가까운 미래다. 앞으로 10년 정도의 시간, 2030년 즈음까지 곧 닿을 미래를 그리고 있다. 2023년 글을 쓰는 현재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최첨단 기술들이 여럿 소개된다. 신체에 통신장비를 이식하여, 더 이상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서 사이보그가 아닌 '물질적 사이보그'가 된 인간이 등장한다. 핸드폰을 마주하면 연락처 정보가 바로 전송되거나 간단한 이체를 할 수 있다. 신원 확인은 스크린에 숨을 불어 이루어진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이러한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을 모두가 환영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완전한 사이보그화'를 꿈꾸는 자녀에 반대하는 부모 사이 불화는, 줄곧 핸드폰을 붙잡고 지내는 당대 아이와 부모 사이 혹은 성적으로 항상 이전 세대보다 '자유분방'해 보이는 현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 사이 불화 등 오늘날에도 흔한 갈등들과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이러한 하드웨어 측면의 발달 외 소프트웨어적 변화도 보이는데 드라마의 중심적인 축은 여기에 있다. 괴물 정치인의 포퓰리즘적 선동과 득세, 이를 등에 업은 '보이지 않는' 기업가들의 횡포는 발달한 기술문명과 함께 세상을 한층 더 디스토피아적으로 만든다. 투표권을 얻으려면 IQ 테스트에서 최소 70 이상의 수치를 받아야 한다거나, 범죄 이력이 있는 사람들의 거주 구역을 따로 만들어 구내 주민들에게 강제로 통금을 부과한다거나, 난민들의 무조건적 추방 등, 끔찍하지만 어쩌면 지금 당장 우리 사회에 도입이 된다고 하여도 '상상 불가할 정도로' 놀랍진 않은, 그런 주장을 하거나 시행하는 정치인들이 등장한다.



드라마는 계속하여 묻는 것 같았다. 세상이 계속하여 나빠지는 건 단지 몇몇 정치인과 기업가들의 괴물적인 인간성 때문인 것 같냐고, 너 자신은 그렇게 선량하며 아무 책임이 없는 게 확실하냐고, 이 모든 것들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렇게도 묻는 것 같았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냐고, 포기하고 끔찍한 변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추진력'을 가진 정치인에게 표를 줘 보는 건 어떻겠냐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 선 긋고 저기도 선 그어 제각기 분리된 채 살면 맘 편하고 좋지 않겠냐고.





마지막 순간, 이 드라마가 내세운 결말은 지나치게 싱거워 결국 이 말을 하고자 여기까지 달려왔나 싶을 정도이다. '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라며 디지털 세계로 이식되는 이디스는 나직하게 선언한다. 방사능 피폭도 감수하며 핵발사의 참상을 대중에게 전달한 그녀. 체포되어 감금당하고 급기야 '사라질' 수 있는 위험 속으로 거듭 뛰어드는 그녀. 총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동료들과 자신의 대의를 믿는 그녀. 그녀의 본질은 사랑이 맞다. 아이언맨의 안경 E.D.I.T.H. (Even Dead, I'm The Hero)와 관련된 이름일지 모른다(는 건 억측일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열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이 단어는 쓰일 곳이 더는 없으리라.









비비언 룩(엠마 톰슨 분)의 죄를 고발하며 울부짖는 이디스의 표정과 목소리를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다. 그 사랑에 대한 기억이 옅어지기 전 나 스스로 그런 용기와 열망을 뿜어낼 기회를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먼지 같은 존재고 삶이지만 그런 에너지를 단 한 번 품을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Is that you?(거기 너니?)"라고 간절한 물음을 언제고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희망이 없어도 계속 나아가는 것. <토리노의 말>에서 흙먼지 투성이인 감자를 먹듯,  방사능과 온실가스로 뒤덥힌 세상 속에서도 우린 심호흡을 한다. 6부작의 미니시리즈는 내게 작은 희망, 아니, 커다란 부러움을 남기고 엔딩 크레딧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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